지정학과 근현대 동북아 역사 및 베세토튜브

  1. 한반도의 지정학적 딜레마
  2. 미국과 중국의 건곤일척 패권경쟁
  3. 미국 해양력 확보와 한반도 진출의 역사
  4. 근대 중국의 고난사와 대외정책
  5. 근대 일본의 팽창과 근린침탈의 역사
  6. 러시아의 동진과 한반도 진출
  7.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지 않으려면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부딪치는 지정학적 요충지로서,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이 두 세력들이 패권경쟁을 벌여온 곳이다. 2천 년간 동아시아의 패권국 역할을 하며 주변국들을 자국 중심의 중화체제 속에서 인식해온 중국은 대표적인 대륙세력이다.

이에 반해, 중국의 중화체제에 대응하는 자국만의 중화체제를 만들어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를 꿈꾸었던 일본은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해양세력이다. 한반도는 전통적으로 대륙세력인 중국에 속해 있었지만, 해양세력인 일본은 대륙으로의 진출을 위해 한반도를 교두보로 삼고자 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지정학적 요충지인 한반도는 수세기 동안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으로 그 대상만 바뀌었을 뿐 패권국들의 격전지가 돼왔다. 동북아 지역내 대화와 협력의 틀을 정착시키기 위해 상호신뢰의 기반을 마련하여 한다. 베세토튜브(besetotube)와 같은 동북아 평화협력 틀에 적합한 분야를 발굴하고 상호 보완관계를 통하여 한·일·중 3국의 평화와 안정, 나아가 아시아 전체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협력 프로젝트가 요구된다.


1. 한반도의 지정학적 딜레마

한반도는 지정학 이론으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교차하는 림랜드(Rimland)지역으로 대한민국은 동쪽 바다 건너 세계 경제력 3위 일본, 서쪽 바다 건너 세계 경제력 2위, 군사력 3위의 중국이 있고  북쪽에는 세계 군사력 2위 러시아, 그리고 태평양 건너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위치하여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지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지일지도 모른다.

국제이슈를 분석하는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여전히 유효한 방법이 바로 ‘지정학(Geopolitics)’을 통한 분석으로 과거 미국-소련 간 냉전시절부터 활용된 ‘림랜드(Rimland)’ 이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정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할포드 맥킨더(Halford Mackinder)는 세계패권을 획득하기 위한 결정적 공간으로 유라시아에 주목했다.

맥킨더는 1904년 발표한 <역사의 지리적 추측>이라는 논문을 통해 ‘추축지대(Pivot area)’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한 후 유라시아 지역을 차지한 국가가 세계패권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추축지대란 시베리아 전체와 중앙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는 공간 개념이다.

그는 1919년 발표한 서적에서 하트랜드(Heartland)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지리적 범위를 흑해 및 발트해를 포함한 동유럽까지 확장하였고 “중유럽과 동유럽을 지배하는 자가 심장부를 지배한다. 심장부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섬(World-Island)을 지배한다. 세계섬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했다.(Who rules Central and Eastern Europe commands the Heartland. Who rules the Heartland commands the World-Island. Who rules the World-Island commands the World.)

지정학의 출발은 유럽(영국,독일)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지만, 이후 학문적 발전은 세계패권국가로 등장한 미국에서 활발히 이루어졌고 미국 봉쇄정책(Containment)을 주창한 스파이크맨(N.J. Spykman)은 기존 하트랜드 이론이 변화된 국제정치 현실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며 ‘림랜드 이론’을 제시한다.

스파이크맨은 세계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유라시아가 아닌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접점에 해당하는 공간에 주목하여 맥킨더가 언급한 ‘내주 또는 연변의 초승달 지대(inner or marginal crescent)’를 ‘림랜드’로 명명하였다.

스파이크맨은 미국이 세계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륙에서 해양으로 진출하려는 소련을 봉쇄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스파이크맨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미국의 전통적 외교정책인 봉쇄정책은 소련의 붕괴를 이끌어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주요한 미국의 외교전술 중 하나로 활용되고 있다.

맥킨더의 ‘하트랜드’ 이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하트랜드 지역에 포함되나 미국 봉쇄정책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림랜드 이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림랜드 지역으로 우크라이나 남쪽, 흑해를 향해 돌출한 크림반도가 갖는 지리적 요건을 고려할 때 우크라이나는 림랜드에 가깝다.

크림반도는 흑해를 지나 유럽의 바다인 ‘지중해’로 이어지는 중요한 해양로의 시발점으로 러시아는 크림반도 세바스토폴에 해군기지를 두고 있으며 최근 개발 중인 북극항로와 더불어 해양진출을 모색 중인 대륙세력인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는 전략적 교두보이다.

반면 중국 혹은 러시아와 같은 대륙세력의 해양진출을 봉쇄해야 하는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가에게 우크라이나는 적의 1차 공격을 방어해야 하는 최전방으로 림랜드 이론으로 바라본 우크라이나 사태의 전개는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러시아간 이해관계와 맞물려 패권경쟁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회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두고 서방(미국, EU)과 신흥 패권국(중국, 러시아)으로 나뉘어 갈등을 연출하고 있어 ‘안보패러독스’에 빠진 동아시아 국가들의 안보불안을 증가시키고 있다.

림랜드(Rimland)인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갈등의 불씨가 또 다른 림랜드 지역인 한반도로 확산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는 와중에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또다시 전쟁 가능한 보통국가를 지향하는 아베의 극우주의는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을 점점 무르익고 있는 상태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분수령으로 평화로운 자유주의 해법을 포기하고 힘을 앞세운 현실주의 외교정책이 확산되면 갈등은 다른 림랜드 지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갈 수 있으며 지정학적으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접점에 위치한 ‘림랜드’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교차하고 북한의 핵폭탄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맞물려 우크라이나 사태를 남의 집 일로만 여겨지지 않게 만든다.

지정학(地政學, Geopolitics)은 지리(인문·자연)가 국제정치와 국제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국제정치 행위를 지리적 변인을 통해 이해,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 목적이 두는 외교정책 연구 방법론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리적 변인은 연구 대상이 되는 지역의 지역 연구, 기후, 지형, 인구 구조, 천연자원, 응용과학 등을 포함하게 된다.

지정학에서는 지리적 공간에 있어서 정치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며 구체적으로는 외교사와 영해, 영토 사이의 상호관계를 조망한다. 학문적으로 지정학은 지리와 정치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역사 및 사회과학적 분석을 주로 한다.

학문외적으로는 정부 부처나 싱크탱크 등의 비영리단체와 중개업체, 컨설팅업체 등의 영리단체를 비롯한 다양한 조직에서 지정학적 예측을 하며 연구 주제는 지역, 공간, 지리적 요소에 따른 국제정치 주체들의 이익 관계 등이 포함된다.

21세기는 세계화의 시대로 경제적으로 세계가 통합되고 기술발전으로 소통이 활발해져 지구촌의 시대가 되었음에도 국가들 간의 관계에서는 여전히 경쟁과 모략이 난무하고 세계 도처에서 전쟁과 폭력사태가 끊이지 않고 있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기원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나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 통용되었을 법한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의 원리가 오늘날 21세기 국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한반도는 독특하게 주변 4국 모두가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강대국들로서 경제력 기준 세계 1, 2, 3위 국가들(미, 중, 일), 군사력 기준 세계 1, 2, 3위 국가들(미, 러, 중)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형국 때문에 한반도와 주변 국가들 간에 벌어지고 있는 국제정치 상황은 전 세계 다른 어느 지역에서보다도 갈등 양상이 심화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한반도 위치라는 지정학적(地政學的) 요인 때문이다.

4국 중 미국, 일본은 해양세력이고 중국, 러시아는 대륙세력으로 국제정치의 역사를 살펴보면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은 끊임없이 경쟁해왔다. 과거 역사에서 보듯이 19세기 내내 해양세력 영국과 대륙세력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전략적 경쟁이자 냉전을 총칭하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Турниры теней)이 전개되었고 지금도 한반도는 그 후유증으로 분단이라는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예를 들어,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조정을 향해 “명을 치러 갈 테니 길을 비켜 달라(征明假道)”고 요구했는데 이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며 이러한 딜레마는 300여 년 후에도 반복되어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도 해양세력 일본과 대륙세력 청나라와 러시아가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치른 전쟁이었다.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던 당시에도 또 다시 지정학적 딜레마가 반복되어 그 해 8월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 내고 무장해제시키는 방식에 대해 해양세력 미국과 대륙세력 소련이 타협의 산물로 38선을 만들어낸 결과 한국전쟁의 참화와 지속된 분단 상태를 72년이 지난 지금도 극복하지 못하고 첨예한 남북 간 군사적 긴장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안타까운 상황이다.

 

2. 미국과 중국의 건곤일척(乾坤一擲) 패권경쟁

국제정치의 오랜 역사를 살펴보면 한가지 중요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으며 한 시대를 지배하는 패권국의 상대적 권력은 상승과 하강 과정을 거쳐 또 다른 패권국으로 대체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15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이 국력 상승과 하강의 과정을 거치면서 차례로 패권국으로 군림하다 미국으로 대체되었다.

오늘날의 국제정치의 핵심은 기존 세계 패권국 미국과 불칭패(不稱覇,마오쩌둥)→ 도광양회(韜光養晦,덩샤오핑) → 유소작위(有所作爲, 장쩌민)→ 화평굴기, 돌돌핍인 (和平崛起, 咄咄逼人,후진타오)하는 신흥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패권경쟁의 심화에서 찾을 수 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패권국으로 등장한 미국도 2008년 미국 발 세계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상대적 영향력이 축소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반면 중국은 경제대국으로 등장하면서 과거와는 달리 공세 외교를 펼치고 미국과 도처에서 패권을 다투는 권력주기(power cycle)를 그릴 수 있다.

중국 경제는 1979년 이후 덩샤오핑의 리더십 아래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면서 30여 년간 거의 연평균 10%의 고속성장으로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부상하였으며 역사상 대부분의 국운 상승대국들과 같이 중국도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자국의 경제력에 상응하는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의 확대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조용히 실력을 키우고 때를 기다리라(韜光養晦)’는 지침과 “100년간 이 기조를 유지하라”는 특별한 당부의 덩샤오핑 지침 아래 기존 패권국 미국과의 협력을 중시해왔던 중국의 기존 전략이 폐기되었음을 의미한다.

중국은 경제성장 결과 축적된 경상수지 흑자를 바탕으로 동남아 및 주변국은 물론 아프리카나 중남미 지역 개발도상국들을 상대로 개발원조를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경제외교를 펼쳐왔으며 시진핑 주석은 유라시아 대륙과 서태평양 및 인도양을 품어 안는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 프로젝트와 함께 IMF의 SDR편입, 준비통화 등 위안화의 국제통화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군사적으로는 남중국해를 자국의 내해(內海)로 만들기 위해 영유권을 주장하며 인공섬과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있어 중국이 더 이상 대륙국가로 남지 않고 서태평양으로 진출하여 해양국가로 변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일로(一路)행보는 명나라 정화함대의 원정을 떠올리게 한다.

중국의 지도자 시진핑은 부주석일 때와 주석일 때 두 번이나 “광활한 태평양에는 중국과 미국 두 대국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하다”라고 발언하여 그 동안 미 해군의 독무대였던 태평양에 진출하겠다는 중국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말로 해석되었다.

역사적으로 국제정치에서 기존 대국들은 국제정치 무대에서 자국의 상대적 영향력 약화를 초래하는 새롭게 등장하는 상승대국의 정치군사적 영향력 확장 요구를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여 두 대국들 간에 긴장관계가 형성되고 이것을 잘못 관리하게 되면 역사적으로 대규모 전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도 상승대국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3국동맹-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과 독일을 견제하고자 하는 기존 패권국인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 3국협상-영국, 프랑스, 러시아) 간의 누적된 갈등이 폭발해 벌어진 전쟁이었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중국의 영향력 확장 의도에 거부감을 표시해왔으며 오바마 행정부는 아시아 회귀 전략(Pivot to Asia)’ ‘재균형(rebalancing)’ 전략을 통해 중국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그간 중동과 유럽에 치중하며 그 지역에 쏟았던 재원과 군사력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재배치하고 아태지역 국가들과의 양자 관계를 심화시키려 노력해왔다.

힘의 외교를 표방하는 트럼프 미대통령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을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동시에 동맹국인 일본, 한국, 호주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미얀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들과 떠오르는 대국 인도와의 교류를 심화시켜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고자 할 것이다.

한편 트럼프는 미국이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리더 역할을 자임하는 동안 스스로의 이익을 희생당해왔고, 그 사이에 동맹국을 포함한 세계 다른 국가들이 부당한 자유무역협정(FTA)과 불공정 무역으로 이득을 누려왔으며 이제는 그러한 리더 역할을 포기하고 미국의 경제적 실리를 최우선에 놓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정책을 펼쳐 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실제로 취임이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파리기후변화협약의 탈퇴 등 기존 다자협력의 틀은 무시하고 철저하게 주고 받는 비즈니스 거래(transaction) 중심의 양자 외교를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상승대국인 화평굴기의 중국과 기존 세계단일 패권국인 미국 간의 세력 대결의 장으로 가장 주목받는 두 곳이 바로 남중국해와 한반도다. 기본적으로 현재 시점에서 중국의 전략적 의도는 미국을 대체하는 세계정치의 패권국이 아니라 아시아의 지역 패권국을 지향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중국의 경제력은 거의 미국에 버금가는 수준까지 올라왔지만 군사력은 아직도 미국이 중국보다 3~4배 많은 국방비 지출과 군사기술 측면에서 현격한 격차가 있는 현실적 문제와 함께, 중국 내부적으로 경제 양극화를 비롯해 환경, 부패, 소수민족 문제 등 난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국이 아시아의 지역 패권국이 되기 위해서는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온 미국을 밖으로 밀어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 동남아에서는 중국의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 주장에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등이 맞서 분쟁 중이고 미국은 이들 국가들과 공조하면서 ‘항행의 자유’를 내세우며 중국과 대립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이 남중국해에 인공섬을 만들고 군사 기지화하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발해왔고 동북아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와 중국의 영향력을 증대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중국은 강력한 미일동맹으로 미국과 안보이익을 공유하고 세계 3위의 경제력을 갖고 있는 일본은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대단히 강하고 버거워 미일 관계를 약화시키기는 힘들다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한반도는 일본과 다르게 북한은 이미 자국의 영향권 아래 있고 한국도 비록 한미동맹으로 미국과 안보이익을 공유하지만 자국이 경제적으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에 정치적으로도 머지않아 자국의 영향권 안에 포획할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3. 미국 해양력 확보와 한반도 진출의 역사

미국 해군제독 전략지정학자이자 전쟁사학자인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Alfred Thayer Mahan, 1840~1914년)은 19세기 해군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해양력(sea power)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해군력이 강한 국가가 막강한 국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1890년에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은 전 세계 해군 강국에 영향을 미쳐 건함 경쟁을 불러 일으켰고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나 런던 해군 군축조약 및 영국, 독일,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다.

머핸은 미국 해군대학 함대전투의 전술과 해양력(sea power)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강의와 해군대학 학장을 역임하였으며 해군대학 청강생으로서 이후 대통령이 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만나 친구가 되었다. 1660년대 이후 발생한 7개의 전쟁과 30여 차례 해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어떻게 영국이 세계 패권국으로 성장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남미로부터 훔쳐온 금·은에 기반한 ‘약탈경제’라면, 영국과 네덜란드는 제조업과 수출에 기반한 무역국가로 자유로운 무역은 국가이익에 결정적이었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해군은 무엇보다 중요했던 사실을 적시하며 강력한 해양력이야 말로 국가발전의 결정적 요소라고 지적했다.

머핸은 미국도 대양해군 육성, 해외 해군기지 확보, 파나마운하의 건설, 하와이 식민지화 등 4개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해군부 차관 시절 이 책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재임 1901~1909)은 하와이·필리핀·괌 등을 차지하고 대양해군을 적극 육성했다.

당시 대서양 국가이던 미국은 태평양 국가가 되었으며 이후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머핸의 전략을 그대로 추진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세계 패권국가가 되었고 수에즈운하·파나마운하·말라카해협 등 전 세계의 중요한 해상 길목을 지키면서 세계경제를 통제함으로써  20~21세기 초강대국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당시 미국은 산업국가로서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던 신생 독립국으로 영토 확장과 남북전쟁(1861∼1865)이후 국민통합의 과제를 끝낸 시점에서 새로운 국가발전 전략을 찾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 이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은 새로운 패권국으로 성장할 저력을 갖춘 미국인들에게 미국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었기 때문이다. 고작 연안해안 방어에 만족하던 미국에게 대양해군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와 필요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 해군은 해안선을 경비하고 때때로 무역선을 보호하기 위해 깃발을 날리는 수준으로 세계의 바다는 여전히 영국이 주도하고 있었고 육지의 25%를 지배하는 세계 패권국이던 시절 미국 정치권과 언론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의 해양전략은 ‘거함거포주의’로 요약되나 머핸의 주장이 빛을 발하는 것은 군사전략을 정치경제학적 측면에서 통찰하여 국가발전 전략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영국과 스페인의 비교를 통해, 기본적으로 미국은 제조업에 기반한 산업국가로서 상업과 무역은 국가경제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으로 파악하였다.

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국제무역을 가능케 할 해양전력을 확보해야 하며 해양전력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수호자로 강력한 해양전력의 확보와 이를 통해 합리적 무역활동에 우호적 정치질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의 해양전략은 작은 배 여러 척보다 압도적 화력을 갖춘 큰 전함이 훨씬 유리하다는 ‘거함거포주의’로 요약되며『해양력』이 보여 주고자 했던 큰 그림은 국가발전의 전망으로 거함거포를 통해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과 함께 미국이 어떤 나라로 성장해 가야 할지, 그리고 그러기 위해 어떤 군사력과 전략을 갖고 있어야 할지에 대한 전망을 제시했기 때문에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문제는 이 책의 인기가 미국에서 끝나지 않고 출판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그리고 일본 등지에서 번역 출판되고 당시 해양 패권국인 영국과 독일은 모든 해군 간부들이 읽도록 하였으며 일본은 머핸의 사상을 온전히 배워오기 위해 해군 장교를 파견하기도 했다.

머핸의 사상을 수용한 국가들은 해군력 강화에 나섰고 결국 군비경쟁으로 치달아 그의 책이 제1차 세계대전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자랑인 발틱함대 격파 계획을 수립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제독의 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 중령은 미국 유학에서 머핸에게 직접 그의 사상을 배웠고 이 책은 첫 출간과 거의 동시에 일본어로 번역돼 일본 군사·해군 교육기관의 교과서로 채택되었으며 오늘날 일본 해상자위대 간부학교에서도 머핸의 이론에 관한 강의를 빼놓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과 중국 등 세계 각국 해군 장교의 필독서가 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미국 독립전쟁 중인 1775. 10. 13일 창설된 대륙 해군(Continental Navy)과 함께 시작된 세계 패권국인 미국의 해군력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형 정규 항공모함 11 척과 이지스 순양함 22 척, 이지스 구축함 63척, 주요 전투함 약 289 척, 각종 함정 279 척, 원자력추진 잠수함 72척, 호버크래프트 74척, 항공기 3,700 대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병력 수는 현역 330,729여 명과 예비역 102,923 여 명으로 433,652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용 기상위성을 보유하여 전세계 외국 연안에 미국의 해양력을 즉시 투사하고, 지역 위기시에 신속하게 개입하여 미국의 군사 외교정책을 실현하는 중추 세력으로 2016년 기준 전 세계 해군력의 60~70%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미국이 한반도에 등장한 것은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따라 평양까지 올라와 통상 요구하다 관민의 손에 불태워지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후 1871년 미국 정부는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하기로 결정하고 주청 미국 공사 프레드릭 로우(Fredrick Low)에게  전권을 위임하duTek.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Rodgers, J.)에게 해군함대를 동원하여 당시 일본을 개항시킨 ‘가나가와 조약’의 전례에 따라 조선도 무력시위를 통해 개항시키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한 자국 선박의 항해 안전보장을 확보하기 위한 통상조약 체결 목적으로 조선과 충돌한 ‘신미양요’ 시기이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비롯하여 군함 5척에, 수해병 1,230명, 함재대포 85문을 적재하여 5월 초순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함대를 집결하여 약 보름 동안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고 5월 16일 조선원정 길에 올랐다.

그는 강화도 앞바다에 내침하여 한양으로 가기 위한 수로를 탐색하기 위해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조선 대표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한 후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여 손돌목(孫乭項)에 이르러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이 벌어졌다.

미국 대표는 조선측에게 평화적으로 탐측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군 함대에 대한 포격은 비인도적 야만행위라고 비난하며 조선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할 것과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해줄 것 등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측은 강화해협은 국방 안보상 가장 중요한 수로이기 때문에 미군 함대가 조선당국의 정식 허락 없이 항행한 것은 주권침해요,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 및 사죄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여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朝美戰爭)이 발발했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으며 덕진진(德津鎭)과 마지막으로 광성보(廣城堡) 작전을 수행하였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여 장군기인 수자기(帥字旗)를 빼앗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하였다.

미군은 일본에서의 개국 과정과는 다르게 처절한 광성보 전투이후에도 통상조약 체결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악착같이 저항하는 조선군에게 질려버린데다가 한양까지 점령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광성보를 점령한 바로 다음날 철군하였다.

이후  대원군은 지지세력의 결속을 위해 척화 전쟁의 승리를 선전하고, 척화비를 전국에 세우게 된다. 1871년 조선과 미국 사이에 발생한 군사적 충돌인 신미양요는 미국이 조선을 군사적으로는 압승을 거두었으나 조선의 개항이라는 정치적 목표의 달성에는 실패한 사건으로 미국은 이 사건을 1871년 한국 군사 작전(Korean Campaign 1871) 또는 1871년 미-한 전쟁(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이라고 부른다.

그 후 미국은 1878년(고종 15년) 3월 상하원 합동으로 조선 개항 결의안을 가결하였고 청나라 실력자인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막후에서 미국과 수교할 것을 권고하고 주선하였으며, 1880년 수신사 예조참의 김홍집이 일본 주재 청나라 공사관의 참사관인 황준헌(黃遵憲)이 서술한 외교정책 방략서이다.

 <조선책략>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친중국(親中), 결일본(結日), 연미(聯美)함으로써 자강(自强)책을 도모해야 한다’, ‘미국은 비록 조선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남의 토지나 인민을 탐내지 않고, 남의 나라 정사에도 간여하지 않는 민주국가로서 오히려 약소국을 돕고자 하니 미국을 끌어들여 우방으로 해두면 화를 면할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들은 미국에 대해서 상당한 신뢰를 가졌고, 처음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한 서양 국가 또한 미국으로 선택하여 1882년(고종 19년) 조선은 구미 국가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최혜국대우, 거중조정(居中調停), 관세 등을 대표 내용으로 하는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nited States–Korea Treaty of 1882)은 조선의 국권이 특정 국가에 훼손될 때 각국에 거중조정을 요청하는 조항에 따라 1885년(고종 22년) 영국의 거문도 점령, 1894년(고종 31년) 청일전쟁 발발, 1904년(고종 41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 조선정부는 미국에 거중조정을 요청하였으나 거중조정의 실상은 단순한 의견전달에 그쳤고 적극적인 중재가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미국은 1905년 7월 29일,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특사인 전쟁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War) 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 제국의 총리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은밀하게 가쓰라-태프트 밀약(Taft–Katsura agreement, 桂・タフト協定)을 체결하였다.

미국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제1조에 상대국이 외교적 위기에 빠지면 원만한 해결을 할 수 있게끔 돕는 ‘거중조정(居中調停)’, 즉 중재를 외면하고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배를 상호 확인하는 국익우선주의 외교를 전개하게 된다.

미국은 일본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주시하였으나 한국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여 1950년 1월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1893~1971)이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소련과 중국의 영토적 야욕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재확인하였다.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결정한다고 발표한 결과 400~5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한국전쟁을 초래하는 등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일본을 중시하는 미국의 외교정책은 냉전기와 탈냉전 시기 내내 지속되어온 워싱턴의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산세력의 동아시아 확산을 막는 보루로 가치를 인식하고 적극 개입했으며 한미동맹을 체결해 냉전시기 동북아전략의 한 축으로 동북아에서 공산세력의 확산을 막아내는 전방기지 역할을, 미일동맹은 후방기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의 시각은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은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보완적 성격의 동맹들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한일 간의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미국은 당혹스러워하며 중재자 역할을 담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미 양국은 최근 10여 년 동안 한미동맹을 단순히 북한을 억제하는 군사동맹의 차원을 넘어서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서 보듯이 경제동맹, 그리고 지구촌의 현안들의 해결에 공조하는 글로벌 동맹의 성격으로 진화를 모색하고 있으며 지속되는 북한의 위협과 핵무기 및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북한이 그러한 능력을 갖추기 전에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해체하도록 압박하는 데 한반도 정책의 최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미국은 세계전략에서 각국을 어떻게 활용할지 끊임없이 연구한다.

미국의 세계경영 전략이 바뀌면 장기의 말처럼 한국의 역할 또한 크게 바뀌는 것은 조·미수호통상조약, 가쓰라-태프트 밀약, 애치슨라인, 데탕트 분위기 조성을 위한 닉슨독트린과 2차세계대전후 독일과 일본의 군사력을  지탱하는 공업시설을 해체하고 재건을 불허하던 정책을 폐기한다.

냉전상태로 돌입하자 소련과의 전쟁에서 방파제로 활용하기 위해 점령정책을 180도 전환하여 전범국의 경제부흥을 추진한 급격한 노선전환의 사례를 참고하면 근저에 세계패권유지를 위한 철저한 국익우선 주의가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우선(America First)주의는 에두르지 못하는 트럼프의 진솔한 표현일 뿐이다.

 

4. 근대 중국의 고난사와 대외정책

청나라 강희, 옹정, 건륭 3대 황제 통치기간 130년은 강건성세(康乾盛世)로 상공업이 발달하여 차 · 면화 등의 상품 작물 재배가 확대와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유럽과의 무역으로 해외에서 많은 양의 은이 유입되었다. 당시 청은 광저우 한 곳만 무역 항구로 개방하고 조정의 허가를 받은 공행을 통해서만 교역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행무역 체제(광동무역 체제)를 실시하였다.

공행은 정부로부터 외국 상인들과의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 수출품인 차, 비단, 수입품인 면화, 모직물 등을 거래하였다. 대신 정부에 높은 금액의 수수료와 관세를 부과하였고, 외국 상인들의 행동을 관리하고 감독하였다. 공행무역의 시행 결과 영국과의 무역에서 차의 수출 초과로 인해 막대한 양의 은(銀)이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17세기 중반 세계 패권국 영국은 청나라에서 만든 자기컵에,  청나라에서 생산된 홍차와 카리브해의 설탕을 넣어서 따라 마시는 홍차의 대유행으로 무역적자와 은(銀)부족에 직면하게 된다. 영국은 무역적자와 시장 확대를 위해 청의 ‘공행무역’ 체제를 바꾸어 무역을 확대시키려 하였으나 매번 거절당하였고 19세기 이후 영국은 청과의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을 청에 파는 ‘삼각무역’으로 몰래 팔았는데 이는 아편전쟁의 발단이 된다.

인도 벵골 지역에서 재배한 마약 ‘아편’을 청에 밀수출하는 삼각무역으로 무역적자를 해소하였으나 청의 아편 중독자가가 200만명을 넘어서고 아편대금으로 막대한 은이 유출되어 은 가격이 급등하여 은으로 세금을 납부하던 농민들의 생활이 파탄나게 된다.

이에 청나라 조정은 1840년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광저우로 파견하여 강력한 아편 단속 정책을 펼치고 마약상들을 홍콩으로 쫓아냈다. 영국은 청나라의 아편 단속에 반발하며 ‘무역항을 확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제1차 아편전쟁(阿片戰爭, Opium Wars)을 일으켜 1842년에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난징조약이 체결되었다. 난징조약으로 영국은 홍콩섬을 할양받고,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를 강제적으로 개항시켰다.

1856년 발발한 제2차 아편전쟁(애로호 사건)은 멸만흥한’을 앞세운 태평천국의 난으로 청이 분열되었던 시기에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개방이 기대에 못 미치자 제국주의 앞에서는 원수도 하나가 되어 영국이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를 공격하여 일어난 전쟁으로 중국인 소유의 영국 해적선 애로호를 빌미로 애로호 사건을 일으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광저우를 침략하여 방화와 살인을 저질렀고, 이와 동시에 러시아군도 청나라 영토로 진격했다.

연합군은 텐진을 점령하여 불평등 조약인 텐진조약을 맺었다. 텐진조약은 청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급하고 개항 항구를 확대하며 아편무역을 합법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청나라는 이때 기독교 공인도 약속했으며 텐진조약 체결 후에도 청나라의 후속 조치가 미진하자 진격을 계속해 1859년에 수도 베이징 근처까지 이르렀고, 1860년에는 별궁인 원명원을 약탈하였다.

베이징이 함락되고 청나라가 완패하여 결국 러시아의 중재로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였다. 텐진 등 11개 항구 개항과 배상금 증액, 홍콩에 접한 구룡반도까지 추가로 할양하고 통상/선교의 자유와 중국의 내륙수운인 양쯔강에서 군함 항해 인정, 조약을 중재한 러시아에게는 연해주를 내주는 베이징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종결되어 중화사상은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아편전쟁은 영국의회 의원인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등이 “승리할 것은 자명하지만 그로 인한 위신의 실추가 더욱 더 두렵다.”, “세상에 이렇게 부정하고 치욕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는 전쟁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중략) 이 전쟁의 승리와 그 이득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득이 크더라도 그로 인해 영국의 국왕과 대영제국이 입을 명예, 위신, 존엄성의 손실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리게 될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성토하는 등 세계사에서 가장 추악한 전쟁을 논하는 데 결코 빠지지 않는 전쟁으로 중국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인 근대사의 본격적인 시작점으로 유럽 열강에 의한 청의 반식민지화를 초래한 전쟁이었다.

그 후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도전한 일본과의 청일전쟁(1894~1895)은 인구와 국토면적, 국력, 특히 군사력 면에서 일본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대국이었으나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한때 동양 최강의 함대로도 불리며 기울어가던 청 왕조의 마지막 자랑거리로 위세를 떨쳤던 북양함대(北洋水師)는 일본의 연합함대에 격멸됨으로써 치욕스러운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다.

조약은 청국의 3년 치(일본의 4년 치) 세출 예산에 해당하는 엄청난 거액인 2억 냥(兩)의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타이완, 펑후 제도 등을 할양하고, 통상상의 특권을 부여하는 강화조약을 맺었으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포기하는 대신 청국에서 배상금 3천만 냥(약 4405만 엔)을 추가로 받기로 하는 수정조약이 체결되고 삼국간섭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이어진 러일 전쟁의 근본 원인 중 하나로 그 후 만주사변, 중일전쟁으로 비화된다.

일본은 조선의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벌인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당시 1년 예산의 4배인 2억냥(3억2000만엔)을 중국으로부터 배상금으로 받아 이 돈으로 관영 야와타(八幡)제철소를 짓고 방적(紡績)시설을 확대하며 ‘일본판 산업혁명’을 이끌어내는 등 일본 근대화의 결정적 촉매제 역할을 하였고 축적된 자본으로 금본위제 도입과 일본은행을 창설하며 금융시스템을 공고히 구축함에 따라 세계적으로 엔의 신인도도 올라갔고, 이에 따라 현재까지 준(準)기축통화로서의 존재감을 이어가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정전조서로 2차세계대전은 막을 내렸으나, 일본의 항복을 촉진한 결정적 요소로 미국의 원자탄 투하와 중국에서의 전면적 항일전쟁 들 수 있으며 이전쟁에서 중국군민의 희생자는 3,500만명에 달하고 각종 손실을 당시 미화로 환산하면 1,000억 달러 이상이었으나, 전쟁배상금 없이 1952년 화일(華日) 평화조약으로 대만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닉슨 독트린과 맞물려 이뤄진 197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는 불과 4일간 교섭으로 역사적 성과를 이루어냈다.

중일공동성명 서문에서 일본이 전쟁에 대해 “반성”하고 중국이 배상청구를 포기함으로써 전쟁상태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중일관계 구축을 실현할 수 있었으나 그 이면에는 교섭 전 과정을 주도한 주은래의 전략적 판단 즉, 대미 데탕트의 연장선상에서 일본을 끌어들여 대소견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한편 일본을 대만으로부터 절연하는 판단이 강력히 작용했으며 합의된 공동성명은 다음과 같다.

일본측은 과거에 일본국이 전쟁을 통해 중국국민에게 중대한 손해를 준 데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깊이 반성한다.

제1항. 일본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 이제까지의 비정상 상태는 이 공동성명이 채택되는 날로부터 종료된다.

제2항. 일본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승인한다.

제3항.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의 불가분한 일부임을 재차 표명한다. 일본정부는 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하며 포츠담선언 제8항에 기반한 입장을 견지한다.

제5항. 중화인민공화국정부는 중일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해 일본국에 대한 전쟁배상 청구를 포기한다.

제7항. 양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패권을 추구해서는 안되며 패권을 확립하려는 타국 혹은 국가집단의 시도에 반대한다.

중국은 엄연히 2차대전 시기 치열한 항일전쟁으로 난징 대학살 등 수많은 고통을 겪은 승전국임에도 장제스는 ‘원수를 은혜로 갚는다’라는 태도였고 마오쩌둥 역시 일본과 국교를 맺을 때 일본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수상이 모택동에게 자진해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제의한 데 대해 인민들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이겼으니 사죄와 배상 따윈 필요 없다’라는 태도를 보였으나 내막은 미국의 대만방위를 일본이 대신 담당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여 일-대만 관계를 단절시키는 과제가 중요하게 떠오른 것이다.

당시 미국의 키신저는 베이징에서 주은래와 회담하며 미국이 중일수교에 반대하지 않음을 확인해 주었고 일본의 핵무장에 반대하며 주은래가 ‘대만조항’만큼이나 ‘한국조항’(한국의 안보가 일본의 안보에 직결됨)을 우려하자, 키신저는 미국은 “궁극적으로 한국으로부터 완전한 철군원칙을 받아들이지만,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진행할 것이며 […] 한국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 응답하였다(U.S. Department of State 2006a)고 한다.

일본에 대한 키신저의 불신은 이미 미중교섭에 표출된 바 있으며 장기비전이 결여된 일본지도자를 경시하여 개미로 비유하는 등 일본 국민성에 대한 회의감은 중일수교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 내었고 일본 내 민족주의 독자노선의 등장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한반도가 해양세력의 자국침략 루트로 활용되거나 한국이 중국을 포위하는 해양세력들의 연합전선의 한 고리로 참여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왔다. 1880년 당시 일본 주재 청나라 공사관의 참찬(參贊; 오늘날의 서기관)이었던 황준헌(黃遵憲)이 당시 러시아(俄羅斯)의 남진정책에 대비하기 위한 외교방략서로 김홍집에게 건넨 《조선책략》에서도 조선 땅은 실로 아시아의 요충에 자리잡고 있어, 형세가 반드시 싸우는 바가 되니 조선이 위태로우면 즉 중동의 형세가 날로 급해질 것이다. 라고 지적한바 있었으며, 중국이 공산당 정부를 대륙에 세운지 1년도 채 않되는 시점에 항미원조(抗美援朝)의 기치 아래 1950년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민감성에 대한 주은래의 우려에 대해 키신저는 베이징 회담에서 미국이 한국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 확답을 듣고 중일 국교정상화를 결정한 이러한 우려는 현재의 시진핑 주석을 포함해 한국전쟁 이후 줄곧 중국 최고 지도자들의 뇌리에 박혀 있어 중국은 북한체제의 지속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라는 구호 아래 지원해온 것이다.

북한을 완충국가로 삼아 남쪽의 한국과 그 동맹국인 미국의 영향력이 휴전선 이북으로 북상하는 것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중국이 반대하는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를 북한이 계속해도 지속적으로 북한에 에너지와 식량을 지원해 왔으나 중국은 갈수록 북한을 전략적 자산보다는 부담으로 보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취임 후 한 번도 북한과의 정상회담을 하지 않았으며 북한 김정은의 도발이 빈번해질수록 이러한 경향은 커지는 한편으로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중국이 앞장서서 북한을 강하게 압박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북한의 대중국 대외무역 의존도가 80~90%의 경제적 레버리지로 인해 미국의 각종 압박 요구에 직면하고 있어 중국이 이 문제와 관련하여 향후 어떠한 행보를 할지 한반도 정세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5. 근대 일본의 팽창과 근린침탈의 역사

조선 중엽 조선과 명나라 정복을 도모한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이래 일본의 에도 막부는 조선조정과 국교를 재개하고 대외적으로 오랫동안 쇄국 체제와 이백여 년간 근린국가와 평화를 유지해  왔으나 1856년부터 1860년에 걸친 아편전쟁 이후 동아시아로 진출하려는 서구 제국주의의 물결은 더욱 거세진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으로 1854년 미일화친조약과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굴욕적인 통상조약(안세이 5개국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막부 정부에서 칙허 없이 처리하여 각지에서 ‘존왕양이’운동이 일어났고, 막부타도론이 대두되어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군이 260여 년이나 내려오던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여 메이지 천황을 옹립하였다.

유신정부를 수립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たいせいほうかん-1867년)과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막번 체제를 해체하고 중앙 통일권력의 확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변혁 과정을 거친 후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하여 거액인 2억 냥(兩)의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타이완, 펑후 제도 등을 할양받는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해체하게 된다.

그 후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던 영국과 “러시아가 일본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 나라가 있으면, 영국이 일본의 편으로 참전할 수 있다”라는 내용의 영일동맹(1902년)을 체결한다. 일본해군은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제국의 극동함대, 제물포항의 전함 두 척을 공격한다.

압록강 전투, 여순항 봉쇄와 황해 해전, 북유럽 발트해에서 29,000Km의 장거리 이동에 지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쓰시마섬 근해에서 격멸한 ‘쓰시마 해전’ 승리로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았으나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재정지출이 너무 커 결국 일본 수뇌부는 미국의 중재하에 러시아에 강화협정을 요청하여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강화협상에서 러시아 제국은 만주와 조선에서 철수하고, 일본 제국에 사할린 남부를 할양하지만, 전쟁 배상금에는 일절 응하지 않는다는 최소 조건으로 협상을 체결하였다. 반면 일본은 미국을 통한 어려운 외교적 거래로 간신히 승자로서의 체면을 지켰다.

그러나 국가예산 1년치의 약 4배에 달하는 20억 엔의 막대한 전쟁비용을 상쇄시킬 수 있는 전쟁배상금을 얻지 못하여 전시 중에 증세로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국민에 의해 ‘히비야 방화 사건’ 등의 폭동과 내각 총사퇴 등의 후폭풍에 시달렸다.

조선(대한제국)은 을사조약으로 통감부 설치, 외교권 박탈 및 1910년 경술국치의 국권 침탈로 이어지게 되며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대동아 공영권을 기치로 하는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군국주의가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발호하는 배경이 되었다.

군사적면에서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결과적으로 일본군에게 상당히 나쁜 영향을 끼쳐 일본 육군의 정신력 우월주의와 보병의 총검 돌격에 일관된 전술과 함께 해군은 쓰시마 해전의 승리를 통해 체득한 함대 결전 사상에 뼛속까지 중독되어 일본 해군의 팽창을 옥죄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무시한채 엄청난 국부를 투입하며 비밀리에 초거대 최강 전함인 야마토(大和)급 괴물전함을 건조하게 된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해전과 같이 고전적이고 장쾌하였던 전함간의 포격전과 맷집 대결은 하늘을 통해 보다 멀리서 때릴 수 있는 항공모함으로 해전의 패러다임이 바뀐 상황에서도 과거의 신화적 승리에 도취되어 ‘거함거포주의’를 고수한 결과, 덩치만 크고 막대한 유류와 운영비가 소요되는 애물단지가 되어 쓸모가 없이 경비가 삼엄한 군항에 정박하여 숙식을 제공하는 ‘야마토 호텔’로 운영하는 자기기만적 형식주의를 초래하게 된다.

영일동맹에서 전수받은 군사기술, 독일이나 프랑스 등의 선진 군사학 기술보다 오히려 정신력 제일주의로 태평양전쟁에 임하는 퇴보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거대 제국이었던 중국과 러시아를 제압하고 아시아에서 신흥강국으로 부상하여 대한제국을 합병하고 요동 등 남만주도 일본 영향권에 확보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 후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사조가 잠시 꽃핀 다이쇼 데모크라시(Taisho Democracy, (1911~1925)가 막을 내리고 하여 만주사변(1931~1932년)과 만주국 수립, 국제연맹 탈퇴에 이어 일본 군부는 일본 정국을 장악하고 정당 내각정치를 종결하며 군국주의 체제로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본격 침략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영일동맹(英日同盟)은 1902년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여 이해를 함께 하던 영국과 일본 양국이 체결한 군사 동맹으로 동맹 협약에는 일본은 중국과 조선, 영국은 중국에서의 이익을 서로 인정하고 한쪽이 다른 나라와 교전할 때에는 동맹국은 엄정중립을 지키는 내용이다.

또한 한쪽이 2개국 이상과 교전할 때에는 동맹국이 협동 전투에 임한다는 공수동맹으로 양국의 제국주의 정책을 상호 지원·보완하는 내용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에 러·일 전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독일 문제로 영국과 우호 관계 유지를 원한 프랑스까지 일본의 일이라면 중립을 지키게 되었다.

한편, 당시 미국은 열강 가운데 어느 한 나라가 만주와 중국에서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려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1902년 영일동맹과 러일전쟁으로 1905년 일본이 승리를 거두자 가쓰라-태프트 밀약를 체결하여 일본과 대러 협조를 위한 각서를 체결한다.

러일전쟁의 전비(20억 엔-일본 정부 예산이 2억5천만 엔으로 8년치 예산, 1986년 미국과 영국에 진 빚 상환완료)충당을 위해서 1907년 일본이 만주에서 철도, 광산 등의 이권을 독점하는 조치를 취하자, 미일 협력 관계는 무산되며 미국은 일본과의 협력을 끝내고 당시 장개석의 중화민국을 원조하며 경제적으로 일본을 제재한다

일본군은 일본제국 육군(長州藩 주축)과 해군(薩摩藩 주축)이 서로 대립하고 육군의 팽창정책이 불러온 미국의 금수조치,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며 중국 내부의 국공합작이 성사되어 너무 거대한 중국 전장에서의 소모전과 함께, 해군이 주도한 진주만공습(1941년)과 연이은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의 소모전과 패퇴에도 항복을 거부하고 1억 총옥쇄, 자살돌격, 카미카제의 총력전을 거듭한 결과 미국의 원자폭탄 실전투입으로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한다.

패전 후 일본은 1945년 10월 2일부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 28일까지 6년 반 동안 연합군 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 SCAP/General Headquarters, GHQ ,連合国軍最高司令官総司令部) 최고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통치아래 일본의 새 헌법 초안을 기안하였다.

헌법 제9조는 ①일본국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하게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에 의한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②전항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육해공군 기타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평화헌법을 제정하고 같은 날 발효한 미일 안보조약(舊 안보조약)과 1960년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협력 및 안전보장 조약(日本国とアメリカ合衆国との間の相互協力及び安全保障条約, Treaty of Mutual Cooperation and Security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Japan)을 체결한다.

‘일본에 대한 무력공격이 있을 경우 미‧일 양국이 공동으로 대처한다는 것’과, ‘일본 안전의 기여와 극동에서의 평화와 안전의 유지에 기여하기 위해 미군이 일본의 시설 및 기지사용 허가를 명시’하여 미군의 전후 일본주둔과 일본안보에 있어  근간이 되는 미일동맹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2016년 현재 주일미군은 1945년 9월 2일 도쿄만 미주리호 선상에서 항복문서 조인식 이후 본토지역에 육군 제 1군단과 요코스카 함대기지대, 오키나와에 제 3해병기동전개부대(III MEF)와 공군 제18항공단 등 약 35,000여명의 미군병력이 주둔하고 있으며, 주일미군사령부가 위치하는 요코타를 비롯하여, 요코스카, 사세보, 가데나 등 7개의 유엔사 후방기지로 유엔사의 작전을 지원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어 있다.

유엔사 후방기지 회원국들은 자국의 선박 및 항공기를 이 지역에 파견 등 아시아 질서유지의 기본 틀로 미‧일 동맹은 냉전시대 일본의 최대 안보위협인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일본 안보를 지켜내고 일본의 자유민주주의 발전과 일본을 세계 경제대국으로 성장시킨 1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전후 일본의 역대 어떤 정권도 미‧일간의 안보조약과 미‧일 동맹이 일본의 안전에 직접기여하고 극동의 평화와 안전유지에 공헌하며, 일본의 정치‧경제 협력관계의 촉진에도 중요하다는 인식하에 미‧일 관계의 중핵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조약체결 이후 일관되게 현재까지 미‧일 동맹체제를 적극 유지‧강화해 오고 있다.

미국의 세계전략 또는 아‧태 지역 전략에서 일본이 지니는 지정학적 위치나 전략적 중요성은 한국보다 훨씬 중요하고 미국의 신고립주의 정책에 따라 급격히 약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으나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고려할 때 한국은 포기하더라도 일본은 절대 버릴 수 없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냉전기를 맞은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45대 총리는 ‘기대려면 큰 나무에 기대자’며 대미종속 노선과 미일동맹을 대외전략의 중심축으로 외교안보에 대해서는 미국의 뒤를 따르면서 국내적으로는 오로지 경제발전에만 매진하는 요시다(吉田) 독트린을 채택하였다.  

그는 “조선 총독부가 얼마나 선정을 베풀었는가? 한국의 반일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는 망언과 일본의 전쟁배상 책임없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과 전후 일본경제를 부흥한 일본총리로 도쿄 제국대학 출신 외교관으로 도쿄대 출신을 관료로 중용하는 엘리트 관료주의를 정착시켜 오늘날 관료가 지배하는 일본사회와 일본우익의 본류로 평가받는다. 

1950년 천재일우의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신(神)이 일본에 내려준 선물”이라고 환성을 올리고 “이제 일본은 살았다. 하늘이 일본을 돕는다.”고 기뻐했다고 하니 12세 소년보다 못한 도덕심과 인간의 본능인 인간애(人間愛)가 실종된 정직한 일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패전 후 더글러스 맥아더 휘하의 GHQ 시대를 거치면서, 경제나 식량사정이 피폐해져 있던 일본은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UN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수행하며 일본에서는 조선특수(朝鮮特需)’로 부르는 전쟁특수로 파괴된 공업기반을 재건하였다.

1954년 12월부터 1957년 6월까지 31개월 동안 이어진 전후 첫번째 대형 호경기로 일본신화에 등장하는 초대 천황 ‘진무(神武)’에서 따온 진무경기(神武景気)는 미국의 원조경제에서 명실상부하게 독립하여 일본 정부가 1956년 경제백서에서 ‘이제 전후(戰後)는 끝났다’고 선언할 정도로 성장하였고 이 시기 이루어진 자유당 – 민주당의 합당으로 자민당이 만년 여당이 되는 55년 체제가 문을 열었다.

진무경기 직전 3년간의 한국전쟁기간 미국은 일본에 ‘특별구매프로그램-화약, 트럭, 군복, 통신기계 등의 전쟁물자 구매’와 미군주둔 비용으로 1950~1970년 까지 100억 달러를 지출하여 전후 일본경제의 부흥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군복·모포 제조 등 섬유산업은 물론 시멘트·강관·식품·차량·중장비 등 모든 분야에서 미군의 발주가 일본 기업에 쏠렸고 미쓰비시중공업·후지중공업·도요타자동차 등 불황에 시달리던 옛 재벌계 대기업들이 기사회생한 것은 물론 이때 벌어들인 막대한 달러를 바탕으로 산업 원재료와 기계설비 등에 대규모 투자를 감행했다.

당시 도요타는 미군으로부터 트럭·탱크로리·덤프 트럭·지프 등을 대량 주문 받아 공장 폐쇄 위기에서 벗어나 세계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등 한국전쟁(1950~1953년)시기 미국이 일본에서 쓴 돈은 최대 30억달러로 추산되며 연이은 베트남 전쟁으로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는 ‘동양의 기적’이라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냉전 종식 이후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1990년대와 2000년대의 급격한 엔화의 상승으로 이른바 ‘잃어버린 20년’이라는 경제침체기를 맞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연평균 10%가까운 성장을 거듭하여 G2 국가로 부상한 사실은 일본인들에게 중국에 대한 경계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2010년 9월, 센카쿠 열도(혹은 댜오위다오) 주변에서 조업을 하던 중국인 어부를 체포하고 이에 중국정부의 맹렬한 항의와 일본관광 금지, 희토류 원소 수출을 중지 등의 압박에 일본은 중국인 어부들을 무조건 석방하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분쟁과 세계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대외정책이 공세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목도한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였다.

특히 2012년 말 집권 2기를 맞은 아베 총리는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강화하는 수구적 국가주의 노선으로 회귀하여 평화헌법 개정을 통해 또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이른바 ‘정상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또한 튼튼한 미일동맹의 기반 위에 중국에 대항하는 반중국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호주, 인도, 필리핀, 베트남, 러시아 등과의 양자 관계 심화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으로 나아가고 있다.

 

6. 러시아의 동진과 한반도 진출

효종대 조·청 관계와 ‘북벌론’ 및 라선정벌

한반도와 유라시아의 대국인 러시아와의 관계는 조선 17대 국왕 효종 때 연해주 흑룡강 방면으로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 세력을 청나라가 조선과 함께 군사력으로 공동 대응한 청-러시아 국경분쟁 사건인 라선정벌(雅克萨战役, Русско-цинский пограничный конфликт)로 나선은 러시아 사람들, 즉 러시안(Russian)을 음역한 것이다.

1650년대 조선이 참여한 ‘나선(羅禪)정벌’의 실상은 17세기 중반 북만주로 남하하는 러시아(나선) 때문에 시작되었고 조선군은 러시아를 저지하려던 청나라의 출병 요구에 따라 송화강과 흑룡강 유역으로 두 차례 출정했다.

1649년(인조 27) 인조(仁祖)가 사망하고 봉림대군이 31세의 나이로 조선의 제 17대 국왕으로 즉위한 효종(孝宗)은 선왕 인조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극히 소극적이고 현실에 안주하여 반청론자들을 멀리하고 측근의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대청 사대에 안주하였지만 젊고 패기 넘친 효종은 부왕과 전혀 다른 경험과 생각을 갖고 있었다.

효종은 양차의 호란도 겪었지만 8년간의 인질기간 동안 청에 이끌려 명·청 전쟁에도 직접 참여하면서 중국 전역을 두루 다녔고 이 과정에서 청의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다. 오랜 전쟁 끝에 결국 청이 승리하였으나 청의 국내외 사정은 매우 불안하였고 이러한 정세를 잘 알고 있던 효종으로서는 언제 다시 생겨날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을 걱정하였다.

효종은 우선적으로 군비를 증강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나 부왕인 인조가 친청 정책을 취하고 있었기에 왕자나 세자 시절에는 이러한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지만 왕위에 오르고 난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게 된다.

물론 이는 갓 즉위한 신왕으로서 당연히 갖게 되는 왕권강화에 대한 의지와도 맞물려 효종은 군비 증강과 왕권 강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대청 복수’를 목표로 하는 ‘북벌론(北伐論)’을 채택한다.

효종은 북벌의 핵심 군영으로 군비증강을 위해서 설치된 어영청에 주목하여 2만 1천명으로 증원하여 핵심 중앙군영인 훈련도감에 필적할 정도로 그 위상을 높이고 국왕의 친위병인 금군(禁軍)의 기병화(騎兵化), 남한산성 수비대인 수어청 강화, 남한산성에 대포 3백문 설치, 강화도 행궁 수축,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박연, 朴淵)을 통해 조총·화포 제작 등의 무기도 개량하였다.

이러한 군비증강 결과 조선군의 전력은 크게 향상되었는데, 1654년(효종 5)과 1658년(효종 9) 두 차례 청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나선정벌(羅禪征伐)에서 연해주 지역에 조총부대를 파견하여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것이 효종 즉위초 이래의 군비증강의 결과로 나선정벌 이후에는 남방은 물론 북방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산성을 수리하는 등 군비를 확충하였다.

제1차 나선 정벌은 1654년(효종 5) 2월 청은 사신을 보내어 조선인 조총군사 100명을 뽑아 회령을 경유하여 3월 10일까지 영고탑 지역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하여 효종은 조총군 100명과 초관(哨官)·기고수(旗鼓手) 등 50여명을 거느리고 출정하여 4월 흑룡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러시아군을 만난 조선 조총군들은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적군의 기세를 꺾고 계속 추격하였고  러시아군은 7일 만에 도주하여 승리한 조선군은 회군하여 본국으로 개선하였다.

제2차 나선정벌은 1658년 3월 청나라의 요청으로 조총군 200명과 초관 기고수 등 60여명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서 청나라 군사와 합류하여 송화강(松花江)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러시아 군사를 만나 청나라 군사는 나아가지 못하자 조선 군사가 용감하게 나아가 화전(火箭)으로 적선을 불태우는 전투를 전개하여 흑룡강 방면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군사의 주력을 거의 섬멸하였다. 조선 측에서도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다.

2차에 걸친 러시아 정벌은 효종의 즉위 후부터 준비해왔던 북벌계획을 간접적으로 실현한 결과였고 비록 적은 수의 군사를 보냈으나 큰 전과를 올리게 된 것은 당시 사격술과 전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효종에게 ‘북벌론’은 단순한 이념적 정치적인 구호가 아니었다.

양란후 위기에 봉착한 조선의 국력을 강화시키고자 노심초사하는 젊고 열정적인 국왕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이었으나 41세 한창의 나이에 효종이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며 효종의 죽음 이후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세력은 효종의 유지였던 북벌을 미련 없이 중지하였다.

아관파천

1895년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아래 명성황후를 시해(일본의 작전 암호명: 여우사냥)한 사건인 을미사변으로 고종은 사실상 일본군에 의해 궁궐에 감금된 상태였고 명성황후 시해를 계기로 조선인의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관계 열강의 비난이 거세지자 일본은 곤경에 빠져 다시 조선에 개혁조치를 요구하게 된다.

8월 을미사변에 이어 11월 공포된 개혁조치에는 조선사회에 민감한 단발령도 포함되었다. 분개한 국민들은 유림들을 선봉으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하였고 김홍집 내각은 의병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궁궐 호위의 중앙군을 전국 각 지방에 보내어 왕실호위는 약화되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은 을미사변 때 출동한 일본군은 경복궁에서 철수하지 않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전국이 소란해지자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공사관 보호라는 명목으로 수병(水兵) 백명을 서울로 데려왔고 이때 친러파인 이범진 등은 베베르와 공모하여 1896년 2월 11일에 고종과 세자였던 순종이 경복궁(건청궁)을 떠나, 어가를 아라사(俄羅斯) 공사관 즉,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서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간 거처한 사건이다.

아관파천 후 ‘친일’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고 ‘친러’ 내각이 자리 잡으며 러시아는 고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 벌채권, 인천 월미도의 저탄소 설치권 등 갖가지 이권을 차지했고 다 잡은 토끼였던 조선을 놓친 일본은 러시아를 달래 유사 시 조선을 공동 점령한다는 골자의 일·러 비밀협정인 로마노프-야마가타 협정을 맺으나 이 협정은 러일전쟁에서 1905년 일본이 승리하면서 사라지게 된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은 당시 한양에 거주하는 서방 외교관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으며 특히 당시 패권국가인 영국과 해양세력 미국은 동북아에서 야심을 드러낸 대륙세력인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의 야만에 눈감고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게   일본을 후원하는 영일동맹이나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 오히려 조선에는 등을 돌리는 결과를 초래해 일본의 조선침탈에 협력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아관파천 후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무력 충돌인 러일 전쟁(Русско-японская война, 日露戦争, Russo-Japanese War)은 만주 남부, 특히 요동 반도와 한반도 근해를 무대로 1904년 2월 8일에 발발하여 1905년 가을까지 계속되었다.

영국과 미국은 러시아 발틱함대 저지와 전쟁채권 매입 등으로 일본은 지원하였으며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러시아 발틱함대를 괴멸시켰으나 전쟁수행을 위한 일본의 재정지출이 너무 커 결국 일본 수뇌부는 미국의 중재하에 러시아에 강화 협정을 요청하여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만주와 조선에서 철수하고, 일본 제국에 사할린 남부를 할양하지만, 전쟁배상금에는 일절 응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협상에 나섰고, 반면 일본 제국은 미국을 통한 어려운 외교적 거래로 간신히 승자로서의 체면을 지켰다.

그러나 군비로 쏟아 부은 국가 예산 1년치의 약 4배에 달하는 20억 엔을 상쇄시킬 수 있는 전쟁배상금을 얻지는 못하여 전시 중에 증세로 궁핍한 생활을 인내한 국민들은 ‘히비야 방화 사건’ 등의 폭동으로 내각 총사퇴의 후폭풍이 있었고, 조선(대한제국)은 을사조약으로 통감부 설치, 외교권 박탈로 1910년 경술국치로 이어진다.

러시아 제국도 일본 제국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내부적인 불만까지 폭발하여 피의 일요일, 1917년 러시아 혁명 발발로 로마노프 왕조와 제정 러시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임시정부, 4월테제, 레닌의 지도하에 볼셰비키들의 10월혁명, 소비에트정부 수립, 적군(혁명파)과 백군(황제파) 사이의 내전(적백내전)을 거쳐 1922년 민주집중제와 연방제를 정치체제로 하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이 수립되었고 2017년은 볼셰비키 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들어선 러시아는 1990년대의 대혼란기를 거쳐 2000년대에 푸틴 대통령의 집권 이후 안정기에 들어섰으며 국력과 국제적 위상의 상대적인 약화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은 과거 냉전기 소련의 위상을 회복하는 것을 대외전략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유럽과 중국사이에 러시아의 독자적 세력권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손잡고 미국에 대치하는 외교를 펼쳐왔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친서방으로 돌아서는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를 2014년 합병하고 동우크라이나 사태에 개입하게 되었으나 미국 및 유럽 등 국제사회의 강력한 반발과 제재를 초래해 지금까지도 러시아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미, 중, 일과는 달리 한 발짝 떨어져 거리를 유지하면서 관여해왔으며 남・북・러 간의 철도 연결, 에너지 파이프라인 연결, 시베리아 개발 등의 프로젝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한국 정부와의 협력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그러나 북한의 핵개발은 항상 중요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했으나 러시아는 한반도 통일에 협력적 태도를 취하도록 할 수 있는 여지가 상당히 있는 잠재적 협력국가로 우선 경제협력부터 심화해가면서 양국 관계를 다져나갈 필요성이 있다.

 

7.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지 않으려면…

해방정국의 격동기 “미국 놈을 믿지 말고 소련 놈에 속지 마라. 일본 놈이 일어선다. 조선사람 조심해라.” 는 내용의 노래가 민초들 사이에 유행했다. ‘울 밑에선 봉선화야’라는 곡에 맞춰 해방 전후에 민중들이 불렀던 노래이다.

국가 지도자의 오판과 외세의존으로 처참하게 당했던 역사적 경험이 빚어낸 무지랭이 백성들의 지혜이자 현대사의 대표적인 경계가(警戒歌)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금도 가슴 찡한 교훈은 강대국들 앞에 민족의 운명을 내놓은 위태로운 현실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되는가?(History repeats itself?) 헤겔은 역사의 철학에 관한 강연《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에서 “역사와 경험이 가르쳐주는 것은, 민족과 정부가 역사를 통해서 무엇을 배우거나, 원칙을 이끌어내고 그에 따라 행동했던 적이 없다”고 했다. 이미 역사가 보여준 그 인과를 다시 반복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이 말은 같은 원인에 같은 결과가 반복된다는 논리를 역사에 적용한 것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이라는 점에서 헤겔은 옳았으며 역사는 되풀이되는데 이를 항상 예측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이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국가가 과거로부터 무언가 배우는 일은 흔치 않고 게다가 그 배움으로 올바른 결론을 얻는 일은 더욱 흔치 않을 것이다.

탈 냉전 동아시아 질서는 중국의 팽창주의, 강대국 간의 경제력을 앞세운 패권경쟁, 경제안보와 인간안보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으며 특히 미중간 G2의 패권경쟁은 경제안보와 전통적 안보간의 경계선을 허물고 있다. 그들은 경제적 허브를 구축하여 전통적 안보허브를 강화하고자 하며 이런 현상은 동아시아의 정치, 경제관계에서 적과 동지의 구분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그 영향으로 대한민국의 기회비용은 북한 핵폭탄과 미사일 문제로 냉전시대보다 더욱 증폭되고 있으며 역내 한중일 3국간의 전통적이고 고질적인 숙적관계로 ‘동아시아 패러독스’ 현상을 연출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각국의 외교정책에서 전통적 안보와 더불어 경제안보와 인간안보를 확립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한·일, 중·일 관계는 역사인식과 숙적관계로 많은 갈등이 있으나 이러한 갈등 상황은 오히려 동북아 평화협력구상과 같은 역내 신뢰구축을 위한 3국간 노력의 필요성을 반증한다. 동북아 지역은 다른 그 어떤 지역보다도 상호의존이 빠르게 심화되고 있어 경성 및 연성 안보 분야에서 협력 수요가 많다.

연성안보 의제는 실제 협력의 효과가 커서 역내국가들의 참여를 보다 쉽게 유도할 수 있으며 연성안보 이슈에서의 협력은 궁극적으로 갈등을 완화하고 경성안보 이슈의 핵심 관건인 상호 신뢰 회복에도 기여할 것이다.

유럽연합의 진행 과정을 보더라도 로마제국 이후 이천년 동안 민족, 지역, 국가간 끝없는 전쟁과 1,2차 세계대전에도 불구하고 석탄과 철강 등 경제문제에서 출발했지만 점차적으로 이슈를 확대하여 가장 민감한 사안인 군비 축소에 대한 논의에까지 이르렀다.

정치적 긴장과 군사적 갈등을 해소하고 공존의 길을 모색하였으며 역내 국가들이 공동으로 노력한 결과로 유럽의 냉전종식과 평화구축에 기여한 헬싱키 프로세스 역시 적대감과 불신이 팽배했던 냉전기에 출범하여 유럽연합(EU)을 결성한 점은 동북아에도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동북아 지역 내 각국의 정치·경제·문화적 이질감과 역사적 반목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다자안보대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단계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며 동북아평화협력 구상은 민감한 이슈에 대한 논의는 가능한 한 후 순위로 미루고 공통 관심분야의 협력에 대한 공감대를 자연스럽게 형성하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지역내 대화와 협력의 틀을 정착시키기 위해 상호신뢰의 기반을 마련하여 동북아 평화협력 틀에 적합한 분야를 발굴하고 상호 보완관계를 통하여 한·일·중 3국 간의 협력이 3국 간 평화와 안정, 나아가 아시아 전체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협력 프로젝트가 요구된다.

현재 한중일 3국의 연간 상호 방문객은 약 2000만  명(2014년 기준)으로 2020년 3000만, 지리적 인접성과 경제관계 및 관광객으로 매년 꾸준히 증가 할 전망이며, 600개 이상의 도시가 자매결연을 맺는 등 만약 경제적으로 더 저렴하고 항공편 보다 소요 시간이 대폭 단축 되는 신교통 수단이 등장할 경우 한중일 3국의 방문객은 폭증할 것이다.

편협한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 自民族中心主義)와 자국 이기주의에 기반한 3국간의 정치 외교적인 갈등은 과거 19세기 서세동점의 시기 서방국가 들의 유산으로 역내 국가간 개방과 협력이 필요한 글로벌 시대는 단연코 지양되어야 한다.

세계 경제의 축이 아시아로 회기한 21세기에도 전세계 인구의 12%에 불과한 서구 국가들이 ‘글로벌 거버넌스’를 장악하여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세계무대에서 아시아 국들은 경제력이나 인구 및 문화적 측면에서 향유하여야 할 본연의 몫을 행사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노정되고 있다.

베세토튜브(besetoTube)는 중국, 한국, 일본의 수도인 베이징(北京, Beijing)↔서울(首尔, Seoul) ↔도쿄(东京, Tokyo) 간을 진공자기부상 궤도를 육상과 해상에 건설하여 극초고속 튜브셔틀을 운행함으로써 21세기 동북아 韓·中·日국민의 친선과 우의를 증진하는 국제협력 프로젝트이다.

서울↔베이징(도쿄)간 약 30분~1시간대 주파와 베이징↔도쿄간 약 1~2시간대 주파를 목표로 100년 대계의 관점에서 22세기 이전인 2099년 완성을 목표로 베이징(北, Be)-서울(首, Se)-도쿄(东, To)를 육상과 해상을 경유하는 최단 구간(약 2000 Km)의 진공 튜브 방식으로 건설하며 평균 시속 1,000~2,000 Km로 주파하는 극초고속 운송 수단을 목표로 한다.

2008년 월가의 악덕 금융자본가 들의 농간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이래 세계경제는 침체가 지속되고 있으며, 화석연료 의존하는 경제는 환경 오염과 전지구적 엔트로피를 증대시켜 미래세대에 부담을 전가하는 지속 가능하지 않는 성장모델이다.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제5모드의 교통수단인 베세토튜브는 이산화탄소 배출의 25%인 교통부문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하고 경제 전반의 신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으며, 한중일 3국의 공동이익과 3국의 국민·인민·신민이 함포고복(含哺鼓腹)하는 동아시아 운명 공동체의 인프라로 21~22세기 생태 패권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다.

Post Author: besetotube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