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대수 한•일 통사(通史)와 베세토튜브

  1. 일의대수의 한반도와 일본열도
  2. 선사시대와 고대의 한반도와 일본열도
  3. 고려시대의 관계사
  4. 조선시대의 관계사
  5. 국권 침탈기의 관계사
  6. 물자의 교역과 생활변화
  7. 한일간 과거사의 정리
  8. 한일간 미래비전

  1. 일의대수의 한반도와 일본열도

‘일의대수(一衣帶水)’란 말은 6세기 후반 수(隋)나라 문제(文帝) 양견(楊堅)이 진(陳) 나라를 치기 위해 양자강을 건너면서 “내가 백성의 부모로서 어찌 한 가닥 좁은 강물로 인해 이를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我爲民父母 豈可限一衣帶水 不拯之乎)”라고 한데서 비롯됐다.

이 말의 뜻은 ‘옷을 묶는 띠처럼 폭이 좁은 강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거리가 아주 가깝다’는 의미로 흔히 사용된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국빈 방문했을 때 궁중만찬에서 일본 아키히토 천황은 .”일의대수(一衣帶水)를 끼고 있는 귀국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예부터 교류가 있었으며, 귀국의 문화는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라고 말하며 천황은 일본이 한국인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슬픔을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도 했다

한반도와 일본열도 및 중국대륙은 대한해협과 현해탄 및 동중국해를 사이에 둔 일의대수(一衣帶水)국가로 고대 이래의 교류를 통해 각각의 틀을 넘어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 받아왔으며 한나라의 시각에서는 미처 볼 수 없었던 사상과 독자적이라고 생각되었던 사실도 깊이 파고들면 그 궤적을 같이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한일간의 지난 역사는 우리에게 좀더 나은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생각해볼 많은 사실을 알려주며 현재가 과거를 떠나 존재할 수 없고, 미래 또한 현재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한일 국민.신민들은 각기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표현하여 지리적으로는 가장 가깝지만 굴절된 역사와 오도된 민족주의의 발호로 자기기만적 정신세계에 있어서는 가장 먼 나라, ‘가까이하고 싶지 않는 싫은 나라’로 각인되어 있다.

이하 한일양국간 시대를 한정하지 않고 전 시대와 전 지역에 걸쳐 역사적 줄거리를 간략하게 통사(通史)로 살펴 반복되는 한국통사(韓國痛史)의 수레바퀴를 더 이상 되돌지 않는 국민적 각성(覺醒)과 미래비전 설계의 기초로 삼고자 한다.

 

  1. 선사시대와 고대의 한반도와 일본열도

아시아대륙과 일본열도는 한반도를 통하여 좁은 해협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왕래하는 사람들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다. 3만 년 전 동아시아는 기후가 한냉하여 해수면이 내려가 육교가 형성되고 북방계 포유동물이 남하하고 사람들도 남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만 3000년전 바이칼호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이동을 시작하여 한 부류는 사할린에서 홋카이도(北海道)로 남하하고 다른 부류는 한반도를 경유하여 약 7.5km의 육교를 통해 규슈(九州)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조몬(조문, 새끼무늬)문화는 약 1만년 전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기 전 채집경제 단계의 석기시대 일본문화로 바다에 접한 구릉에서 생활하고 패총을 남겼으며 이후 기후가 온난해져 빙산이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여 약 8000년전 쓰시마가 한반도에서 분리되었고 일본 열도는 신석기 시대로 이행하여 기원전 4세기 야요이 문화(彌生文化)가 시작될 때까지 조몬 문화가 전개되었고 수렵, 어로, 채취로 생활을 영위하였다.

일본의 유명한 역사유적지 혹은 유서 깊은 사원이나 신사를 가보면 도래인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일본 고대문명의 형성과 도래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5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제1기는 기원 전 3세기에서 기원 후 3세기까지이다. 이때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 벼농사, 청동기, 철기, 관개기술 등을 전했다. 여기에는 고도의 노하우가 배어 있기 때문에 사람의 이동이 없으면 전수가 불가능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수렵과 어로에서 농경생활로의 문명전환을 이룩했다. 이른바 야요이 문화(彌生文化)가 그것이다.

제2기의 피크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까지이다. 이때 중국에서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304~439)의 전란이 계속되고 한반도 일대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이 세력을 다투면서 왜(倭)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의 비문이나 칠지도(七枝刀, 369)의 명문 등은 당시 숨 막히게 돌아가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와중에 가야제국(加耶諸國) 남부의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많이 건너갔다. 그들은 오카야마(岡山) 지역 등의 수장(首長) 밑에서 공인 등으로 활약했다. 거대한 고분을 축조한 기술자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었다.

제3기의 피크는 5세기 후반으로 중국에서는 한족이 세운 남조와 한족을 장강 이남으로 밀어낸 유목민족이 세운 북조가 대립하던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439년 ~ 589년)로 한반도에서는 고구려가 남진전쟁을 벌여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475년)했다.

고구려군에 사로잡힌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아차산성에서 처형당하고, 백제왕족은 웅진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재건했으며 이 전란통에 북부 가야와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많이 이주했다. 그들은 오름가마에서 고온으로 구운 스에키(須惠器, 경질토기)를 생산함으로써 부서지기 쉽던 조몬토기(繩文土器)나 야요이토기를 만들고 도래인은 수공업 기술을 살려 야마토 정권(大和王權)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여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에 참여했다.

제4기의 피크는 6세기 후반이다. 한반도에서는 신라의 공격으로 가야가 멸망(562)하고, 중국에서 수(隋)가 통일왕조를 수립(581년)했다. 고구려와 수의 쟁패는 격렬했고, 고구려·백제·신라의 다툼도 치열하였으며 그 격변 중에 가야계통의 사람들이 다수 일본열도로 건너갔다.

그들은 선진기술을 발휘하여 생산부문을 선도하고, 문서작성 등의 실무를 담당하여 일본의 고대국가 확립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제5기의 피크는 7세기 후반이다. 618년 중국에서는 당(唐)이 수를 이어 제국을 건설하고 고구려와 패권을 다퉜다.

신라는 국제정세의 흐름을 간파하고 당을 이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660), 이를 부흥하기 위해 몰려온 왜군을 백촌강(白村江)전투에서 무찔렀다(663).

그리고 고구려를 멸망시키고(668), 내친김에 당의 세력을 몰아내 삼국을 통일(676)했고 그 여파로 고구려의 고토(故土)에서 발해가 건국(698)되었고 그 과정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이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했다. 그들은 사찰 건축, 불상 조각 등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일본의 불교예술을 꽃피웠다. 도래인들은 일본의 행정 관료로서 활동하거나 왕권과 결합하여 세력을 떨쳤다.

7세기 후반 왜가 백제·고구려·신라의 통일전쟁에 끼어든 이른바 백촌강 전투(663)는 동아시아를 뒤흔든 국제전쟁으로 당시 당(唐)은 고구려·돌궐과 패권을 겨루고, 백제·신라도 영토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당은 여러 차례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실패하고, 신라는 백제의 공략으로 궁지에 몰렸으며 여기에 각국 사이에 치열한 외교전이 벌어져, 돌궐·고구려·백제·왜와 당·신라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삼국통일전쟁은 후자가 전자를 공략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먼저 신라군은 바다를 건너 온 당군(唐軍)과 합세하여 사비성(부여)을 함락시킴으로써 백제를 무너트렸다(660). 그 때까지 백제를 통해 선진 문물과 기술을 수용해온 왜는 큰 충격에 빠졌다. 백제의 잔존세력은 부흥군(復興軍)을 결성하여 당과 신라의 지배에 대항하였다.

백제의 지원요청을 받은 왜는 궁궐을 쿠슈(九州) 북부로 옮기고 임전 태세에 들어갔다. 일본에 체재하고 있던 왕자 부여풍[夫餘豊(풍장)]은 왜군의 호위를 받으며 백제로 돌아와 즉위하고, 663년 왜는 전국에서 동원된 호족과 농민으로 편성된 2만 5천여 명의 대규모 군대를 백제에 파견했다.

신라·당의 연합군은 금강 하구의 백촌강에서 백제·왜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왜군은 퇴각하고 백제 부흥군은 거점인 주류성을 잃었다. 부여풍은 고구려로 피신하고, 백제의 왕족·귀족은 대거 왜로 망명했다. 이로써 백제의 부흥운동은 막을 내렸다.

왜는 백촌강 전투에서의 패배를 국가존망의 위기로 인식하고 국가방위를 위해 전대미문의 조치를 취했다. 왜는 당과 신라가 침공해올 것에 대비하여 왕궁을 오미(近江)로 옮겼다. 그리고 쓰시마(對馬)·이키(壱岐)·츠쿠시(筑紫)에 방인(防人)를 두고, 망명한 백제인의 기술을 빌려 쿠슈 북부에서 세토나이카이(瀬戸內海)에까지 산성을 축조했다.

또 큐슈에 설치한 군사·외교 기관인 다자이후(大宰府) 전면에 수성(水城)을 쌓는 등 방어체제를 정비했다. 그리고 징병을 위해 호적을 작성하고 성문법전을 제정하는 등 제도개혁을 서둘렀다. 그 후 신라·왜·당은 국익을 지키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왜는 당보다는 신라를 중시하는 외교노선을 선택했다.

그리고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을 받아들여 율령국가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를 확립했다. 이처럼 백촌강 전투는 신라의 삼국통일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의 역사에도 한 획을 그은 일대 사건이었다. ‘왜국’을 넘어 더 큰 통일국가로서의 ‘일본’이라는 국가가 실체로서 등장한 것이다.

도래인이 일본에서 동류집단으로 거주하면서 문명국가 건설에 기여한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이름이 들어가거나 그들로부터 유래한 지명은 현재에도 일본 각지에 남아 있다.

도쿄 근교의 고마진쟈(高麗神社), 오사카(大阪) 근처의 구다라지(百濟寺)와 구다라오진쟈(百濟王神社), 구다라에키(百濟驛), 구다라가와(百濟川), 구다라바시(百濟橋), 구다라쵸(高麗町), 구다라바시(高麗橋), 나라(奈良) 지역의 구다라무라(百濟村) 등이 그것이다.

 

  1. 고려시대의 관계사

중세에는 몽골제국의 성립이라는 세계사의 전환과 연동하여 고려와 원(元)의 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몽골은 서하(西夏), 티베트, 금(金)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와 중동, 러시아까지 복속했다.

그 후 남송(南宋)마저 멸망시키고 중국 전체를 차지했으며 몽골이 아시아와 유럽을 하나로 통합하는 거센 풍랑 속에서도 고려는 30여 년 동안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였으나 입조를 약속하고 몽골과 강화한 이후 영토와 사직을 보전할 수 있었다.

1274년 몽골은 고려를 압박하여 3만여 명의 연합군으로 사대관계를 거부하는 일본을 공격했다. 여몽 연합군은 쓰시마와 이키를 점령한 뒤 하카타만(博多灣)으로 진격했으나 폭풍우를 만나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1281년 여몽 연합군은 남송군(南宋軍)을 포함하여 14만 명의 군세(軍勢)로써 다시 일본을 침공했으나 이때도 태풍이 불어 일본점령은 실패로 끝났다.

일본이 몽골의 침공에서 입은 피해는 고려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고려가 완충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고려를 몽골과 같은 침략자로 여겼다. 일본인들은 몽골을 ‘무쿠리’, 고려를 ‘고쿠리’라고 부르며 공포심에 떠는 한편으로 적개심에 불탔다.

그리고 가미카제(神風)가 나라를 구해줬다는 신국사상(神國思想)을 만들어 선민의식(選民意識)을 고취하고 배외주의(排外主義)를 강화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의 청년들이 비행기에 몸을 싣고 미국의 군함으로 돌진한 가미카제 특공대(神風特攻隊)는 이렇게 만들어진 신화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역사의 오용(誤用)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웅변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 조선시대의 관계사

14세기 후반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대륙에서는 몽골이 쇠퇴하고 명(明)이 들어섰다. 조선에서는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건국되었고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가 무너지고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가 들어섰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 각국이 요동치는 가운데 왜구(倭寇)가 창궐(猖獗)하여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약탈했다. 왜구는 서쪽 일본 해안 일대에서 생활 기반을 상실한 중소 무사와 농어민이 해적으로 변한 집단이었다. 기타쿠슈 해안지역, 특히 쓰시마·이키·마쓰우라(松浦) 지방이 주된 거점이었다.

왜구는 14~15세기의 전기왜구와 16세기의 후기왜구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한반도에 큰 피해를 입힌 것은 주로 전기왜구였다. 왜구는 처음에 주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 해안지방을 습격하여 조창(漕倉)과 조운선(漕運船)을 약탈했다. 또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았다.

몽골의 오랜 간섭으로 군사력이 약화되어 해안 방어가 어려운 고려가 조창을 내륙으로 옮기고 육로를 이용하여 조세를 운반하자 왜구는 내륙 깊은 곳까지 침입했다. 왜구의 약탈로 고통을 겪은 고려의 민중은 고향을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말기 조정은 무로마치 막부 등에 왜구의 금압을 요구하고, 화약무기를 활용하여 왜구를 토벌했다. 그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명과 조선이 건국되고 무로마치 막부가 안정되자 왜구의 세력은 약화되고 동아시아에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명을 중심으로 한 조공책봉체제의 성립이었으며 조선과 무로마치 막부는 1404년 국교를 맺고 대등한 처지에서 교류했다. 

16세기에 들어서서 명의 세력이 약화되자 동중국해 연안에서 다시 왜구의 약탈과 밀무역이 성행했으며 그 틈을 타서 북방에서는 여진족(나중의 만주족)이 강성해졌다.

반면에 오랜 평화에 젖은 조선에서는 국방태세가 약화되었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하고 동아시아 정복을 꿈꾸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일어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특히 한일관계를 다시 한 번 뒤집어놓았다.

100여 년의 전란에서 단련된 15만여 명의 일본군은 조선을 침략하여 불과 20여 일 만에 한양을 함락(1592)하였으며 조선의 국왕 선조(宣祖)는 중국과 국경지대인 의주(義州)로 피신하였으나 조선 각지에서는 무력한 조정과 관군을 대신하여 의병이 봉기했다.

의병은 충의에 불타는 유생, 관료, 농민, 승려들로 구성되었다.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한산도(閑山島) 등지에서 일본군을 쳐부수고 제해권을 장악했다. 명은 조선조정의 지원 요청을 받고 처음 3천여 명에서 전쟁이 끝날 무렵에 10만 명 정도로 불어났으며 일본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화의를 제안했다.

명과 일본의 화의교섭에서, 일본은 한반도의 남부지방 할양과 감합무역(勘合貿易)의 부활 등을 요구했으나 명이 이를 거절하자 1597년 일본은 대군을 증파하여 다시 조선침략을 개시했다.

이번에 일본군은 곡창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전라도 지역을 공략하였고 일본군은 각 지역에서 닥치는 대로 방화, 약탈, 학살을 자행하였다. 심지어는 전공(戰功)을 증명하기 위하여 조선인의 귀와 코를 베어 일본으로 보냈다.

일본군은 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선인을 마구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 넘겼으며 조선과 명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에서 승리하는 가운데 도요토미가 죽자 일본군은 철수했다. 7년 동안의 임진왜란에서 사망한 일본군은 5만 명이 넘었고, 무고하게 희생된 조선인은 100만 명을 헤아렸다.

조선은 전국을 휩쓴 장기 전쟁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농지가 황폐한 것은 물론, 제도가 문란하고 기강이 무너져서 위기에 처했다. 당연하지만 조선에서는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였고 일본에서는 대량의 병사 징발, 군량 조달, 무기 구입, 세금 부과 등으로 국력이 황폐해져 도요토미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徳川) 정권이 탄생했다.

명은 조선을 원호한다는 명목으로 수십만 명을 동원하고 막대한 군비를 소진함으로써 국력이 쇠퇴하였고 이자성(闖王)의 난으로 북경이 함락되고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자살하였고 만주족(後金) 청(淸)나라와 청에 투항한 오삼계의 반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조선을 빈사상태로 몰아넣고 중국과 일본의 정권을 교체하게 만든 대규모 국제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을 통해 삼국은 각국에서 개량된 무기의 위력을 실감하고 이것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국방체제에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의 판옥선(板屋船), 명의 홍이포(紅夷砲), 일본의 조총(鳥銃) 등이 그것들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은 수년 동안 국교를 단절했다. 그렇지만 대외관계의 안정을 꾀하려는 조선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두 나라는 곧 국교를 재개(1607)했다. 기유조약(己酉約條)으로 조선과 쓰시마는 통교무역을 재개하였ek.

조선 국왕은 도쿠가와 장군(德川 將軍)과 대등한 지위에 있으면서, 쓰시마 소씨(對馬 宗氏)를 하위에 두는 2중의 외교관계가 부활했다.

이후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일본은 조선에 국왕사(國王使)를 파견함으로써 조일 관계는 1811년까지 안정을 유지했다.

임진왜란(1592-97)은 대규모의 노예사냥 전쟁이자 문화약탈 전쟁이었다. 일본군은 임진왜란 중에 9~14만 명(일본 측 연구에서는 2~3만 명, 한국측 연구에서는 20만 명을 주장, 대략 10만 명 전후로 보는 견해가 다수)에 달하는 조선인 남녀노소를 납치하여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 포르투갈 등의 상인에게 팔아 먹었다.

일본군이 어린이와 여자까지 조선인을 대거 납치한 목적은 농업·가사·공장 노동력의 보충, 국제 노예상인에의 매매, 군사력의 충원 등이었다. 100여 년 동안 내전에 휘말려온 일본에서는 젊은 남자들이 대부분 전쟁에 동원되어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조선인은 이를 보충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었다.

마침 중국-동남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항로에서 포르투갈 상인이 중계무역을 벌이고 있었고 일본군이 조선에서 자행한 노예사냥은 세계 규모의 거래 네트워크 속에서 저지른 만행이었다. 일본에 끌려온 부로인 중에는 의사, 유자(儒者), 승려와 같은 지식인이 있는가 하면, 도공, 장인, 무사와 같은 기술자도 있었다.

유학자 강항(姜沆)은승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에게 주자학을 전수하여 그가 유학자로 개종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후지와라는 ‘사서오경왜훈(四書五經倭訓)’을 저술하고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 등 많은 제자를 길러서 근세 일본의 유학사와 정치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강항이 그 시조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강항은 교토에서 성리학서적 등을 필사하여 주자학을 보급하고, 귀국한 후에는 ‘간양록(看羊錄)’을 간행하여 일본의 실상을 조선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그가 붙잡혀 가서 상륙한 오츠시(大洲市)에는 홍유강항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가 서 있다.

기이번(紀伊藩)으로 붙잡혀 간 이진영(李眞榮)과 이전직(李全直) 부자는 번주(藩主)의 시강(侍講)이 되어 성리학과 제왕학을 가르쳤다. 그들은 조선의 성리학을 기이번에 정착시켜 정치와 문화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 명치유신이 무혈혁명의 성격을 띠게 된 배경에는 이들의 가르침이 작용한지도 모르겠다.

사가번(佐賀藩)의 홍호연(洪浩然, 1581~1657)도 초대 번주 카츠시게(勝茂)의 시강이 되어 번학(藩學)의 기초를 세웠다. 그는 서예가로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고, 번주가 죽자 순사(殉死)하여 조선 유학자로서 절의(節義)를 지켰다. 조선 유학자가 일본에 끌려가 세운 공로는 침략전쟁이 가져온 불의(不意)의 결과였지만, 한일 문화교류에서 특필(特筆)할 만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 연행된 이삼평(李參平) 등의 도공들은 서일본(西日本) 각지에서 차별과 박해를 받으면서 생활자기를 구웠다. 이들은 아리타야키(有田燒), 사츠마야키(薩隆燒) 등의 원조가 되어 일본을 세계 유수의 도자기 생산국으로 끌어올렸다. 목수, 석공, 직물공, 한지제작공 등의 사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쿠슈(九州) 서북지역에는 연행된 조선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도진마치(唐人町)’이 여기저기 존재했다. 다이묘(大名)들은 이들을 통해 조선의 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여 영지 개발을 꾀했다. 그렇지만 일본에 끌려온 대다수의 조선인은 주인에게 예속된 노비·하인·하녀로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본사회에 적응하며 동화되었으나, 오랫동안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학대받으며 비참한 인생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또 분야별로 특수부대를 편성하여 조선의 문물을 조직적으로 약탈하도록 했다. 일본군에는 교토고잔(京都五山)의 학승(學僧)들이 자문역으로 종군하면서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 서경덕(徐敬德)의 ‘화담문집(花潭文集)’,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등 귀중본을 다수 반출했다.

경복궁 교서관(校書館) 주자소(鑄字所)의 금속활자와 인쇄기구, 조선본과 중국본의 서적 등도 빼앗아 갔다. 심지어는 불상, 불화, 범종, 석등 등과 같은 문화제와 매화, 동백 등과 같은 식물까지도 약탈했다.

일본에 끌려 간 조선인은 주자학·도예·인쇄술·목면(木棉) 등의 신문명을 일본에 전수하여 도쿠가와문화(德川文化)를 꽃피게 한 은인이었다. 그리고 일본이 약탈해 간 조선의 문화재는 그 자체가 당대를 대표하는 보물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공적과 가치를 고대 한일관계에서 도래인이 차지하는 위상과 같은 차원에서 평가할 수는 없다. 이것은 노예사냥과 문화약탈의 잔혹함과 무도(無道)함을 호도(糊塗)하는 궤변(詭辯)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에 거주하게 된 일본인도 나타났다. 조선에 투항하여 관직을 받고 충성을 바친 김충선(金忠善) 등이 그들이다.

사료상에 항왜(降倭) 등으로 기재된 이들은 3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조총과 화약 제조기술, 사격기술 등을 조선에 전수했다. 일본에서 개량된 유럽의 무기와 전술이 전쟁을 계기로 조선에도 유입된 것이다.임진왜란 이후 재개된 통신사의 왕래과정에서도 문화교류가 이루어졌다.

통신사는 ‘신의(信義)를 주고받기 위한 사절’이라는 뜻으로, 통신사의 교류는 양국의 관계가 대등함을 나타내는 외교 형태였다.

사대부와 연예인 등으로 구성된 조선의 통신사 일행은 일본 국내를 여행하는 도중에 일본의 학자, 문인, 승려, 의사, 화가 등과 시문과 필담을 주고받으며 활발히 교유했다.

그들은 일본사회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통신사 일행을 수행하던 아이들의 춤에서 유래한 ‘가라코오도리[唐子(韓子)踊り/ 唐人踊(韓子踊)]’가 오늘날도 전해지고, 비와호(琵琶湖) 남쪽 연안에는 죠센진가이도(朝鮮人街道)라는 길이 남아 있다.

 

  1. 국권 침탈기의 관계사

근대에 들어 한일 사이의 인간 이동은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먼저, 무력으로 주권을 짓밟고 영토를 빼앗으며 시장을 확장하는 제국주의 시대에 다양한 유형의 일본인이 조선에 건너와 일본인 사회를 형성했다.

19세기 말에 벌써 조선의 개항장(開港場)을 중심으로 형성된 거류지에는 3만여명의 일본인이 관리, 무역상, 일용품·식료품 상인, 목수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거지역에 혼쵸(本町), 고가네마치(黄金町), 아사히쵸(旭町), 메이지쵸(明治町), 벤덴쵸(辯天町) 등의 일본식 지명을 붙이고 고토히라대신사(金刀比羅大神社), 스미요시대신사(住吉大神社) 등의 신사와 신마치(新町) 등의 유곽을 새로 지었다. 일본식 식민도시의 전형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재조(在朝) 일본인은 러일전쟁(1904-05)과 한국병합(1910)을 계기로 급속히 증가하여 1936년에 60만 명, 1942년에 75만 명을 기록했다. 그밖에 2개사단 군대가 주둔했는데, 군인 수는 패전 당시 수십만 명으로 불어났다.

대체로 조선 인구의 3%에 불과한 일본인이 2천 5백만 명의 조선인을 지배한 셈이었다. 재조 일본인의 핵심은 조선총독부 등 각종 행정기관에 종사하는 공무자(公務者)이었고, 농·수산업에 종사한 자는 소수인 반면, 상공업·교통업 종사자가 주류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투철한 지배자 의식을 가지고 조선인을 멸시하고 차별하며 통제했으며 1931년 만주사변으로 촉발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욕이 극대화되던 전시체제 아래서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개조하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고 군인과 노무원 및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동원했ek.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흡수정책이 더욱 가속화되어 일본 기업이 더 활발하게 진출함은 물론, 3.1운동과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잠깐 동안의 허울뿐인 문화통치의 상징이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강제 폐간, 창씨개명 시행, 징병제까지 도입하고 물자와 인력 공출이라는 병참 기지화 정책은 조선민중을 이전에 겪지 못한 유례없는 고통에 빠지게 하였다.

한편, 한국병합 때까지 조선인의 일본 이주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들은 대부분 유학생이거나 단기노동자였다. 이후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가혹해지고 교통수단이 발달함에 따라 도일(渡日) 조선인 수는 해마다 늘어나서1930년대 중엽에는 재조 일본인 수를 넘어섰다.

그리고 중일전쟁 발발(1937)이후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되어 조선인도 전시동원의 대상이 되자 도일자(渡日者)는 격증하여 1945년에 재일 조선인은 200만 명을 넘어섰다. 재일 조선인이 낯설고 물설은 일본사회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취업과 거주의 차별이 심해 조선인은 공사현장의 육체노동자, 방적공장의 직공, 넝마주이 등으로 간신히 생계를 꾸려갔다. 오사카 등의 대도시에는 조선인의 집거지(集居地)가 형성되었는데, 일본인이 거의 살지 않는 하천부(河川敷)·임해부(臨海部)인 경우가 많았다.

집거지에는 조선 요리점이나 식재점(食材店) 등이 들어서고, 가내 공업적인 제조업이 생겨났다. 강제 연행된 조선인들은 탄광·광산이나 토목공사 현장, 또는 군수공장 등에 집단으로 수용되어 중노동에 종사했다. 그들 중에서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하는 자가 속출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조선인 유학생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1910년대에 5백여 명이었던 유학생은 1940년대 초에는 5천여 명으로 증가했다. 이들은 일본의 근대문명을 조선에 도입하고 활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재일 조선인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민족운동과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일본정부는 이들을 엄격히 탄압했다.

조선인을 멸시와 공포의 대상으로 여긴 일본인들은 관동대지진(1923)을 빌미로 삼아 6천 7백여 명의 조선인을 학살했다. 일본정부는 내선협회(內鮮協會)·협화회(協和會) 등을 조직하여 조선인을 교화(敎化)하고 통제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황국신민화와 전시동원을 추진했다. 일본의 패전을 앞두고 많은 조선인이 공습과 원폭으로 희생되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한국이 식민지에서 해방되자 한일 사이의 인간이동은 또 한 차례 격랑에 휩싸여 한반도에 거주한 일본인은 불과 1-2년사이에 거의 대부분 돌아갔다.

식민자의 업보로 인해 더 이상 눌러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일본열도에 거주한 한국인은 반 정도가 귀국하고 나머지는 생계를 위해 일본에 남았고 오늘날까지도 오사카 등지에는 코리아타운이 있으며  재일동포 중 10만여 명은 북한으로 송출되었다.

그밖에 사할린 등지로 연행된 4만여 한국인은 패전 후에 일본이 그대로 팽개쳐두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디아스포라의 비극을 재생산하고 있다. 한일 국교정상화(1965) 이후 한일 사이의 인간 이동은 새로운 단계를 맞았다. 두 나라 사이에 외교, 교역, 사업, 유학, 스포츠, 교류, 여행 등이 활성화됨에 따라 왕래자와 거주자 수는 날로 증가했다.

1965년 당시 연간 왕래자수는 1만여 명에 불과했는데, 2010년에는 그 수가 546만 명으로 늘어났다. 기하급수적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이들을 실어 나르는 항공노선이 40여개, 주간 항공편이 450개나 된다. 서울의 이촌동에는 일본인 집단거주지가 생겨났고, 도쿄의 신오쿠보(新大久保)에는 새로운 코리아타운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한국문화와 일본문화가 일상에서 실시간으로 교류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문화가 한국의 방어장벽을 뚫고 일방적으로 흘러 들었는데, 그 이후 한국문화의 일본진출이 활발해져 지금은 거의 互角을 이루고 있다. 이른바 한류와 일류(日流)라는 현상이 그것이다. 서울올림픽(1988)과 한일월드컵(2002) 대회가 신경향을 추동한 주요 전기였다.

 

  1. 물자의 교역과 생활변화

한국과 일본은 대체로 비슷한 자연 생태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바다로 둘러싸인 좁은 육지, 많은 산과 적은 평지, 뚜렷한 사계절과 여름 강수, 우거진 숲과 완만한 하천, 쌀을 주식으로 하는 높은 인구밀도 등. 그렇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물산에도 유사한 것이 많아서 유무상통(有無相通)이라는 점에서는 취약하다.

심지어 오늘날은 산업구조조차 비슷하여 수출품에서도 겹치는 품목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은 오랜 역사 속에서 깊은 교역관계를 맺어왔다. 지리적 근접성과 문화적 친근성이 있는데다가 수직적 분업으로 얽힌 부문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동이나 전쟁의 수행은 자연히 물자의 교역을 수반한다. 일본에서 쌀농사를 짓고 도기를 생산하기 시작했을 때도 한반도에서 기술을 가진 사람과 더불어 생산재도 건너갔을 것이다. 전근대 시대에는 외교사절의 왕래와 교역활동이 중복되는 경우도 많았다.

사절단에 상인이 동행하여 틈틈이 물품을 사고 팔았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정상회담이 열릴 때 경제인들이 대거 수행하여 상담을 벌이는 것을 보면 외교와 교역은 원래부터 표리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통일 신라와 일본의 교역은 김태렴(金泰廉) 일행의 방일(725)을 통해 일단(一端)을 엿볼 수 있다. 토다이지(東大寺) 대불(大佛)의 개안 공양(開眼 供養)직후 일본에 도착한 김태렴 일행은 헤이조쿄(平城京)에서 대불을 참배한 뒤 대규모 교역활동을 전개했다. 이때 거래한 물품은 토다이지 쇼소인(正倉院)에 남아 있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목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신라산(新羅産) 방석과 먹,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든 좌파리(左波理, 놋쇠)라 불리는 찬합식 그릇과 숟가락 등의 수공 금속제품, 동남아시아에서 가져온 향료나 약물·안료·염료, 당과 서역에서 들여온 진귀한 물품들을 일본에 건넸다. 『화엄경론』과 같은 불교경전도 들어 있었다.

신라상인들은 9세기 전반에 중국 연안과 한반도에 광범한 교역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활발하게 무역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중국 월주산(越州産) 도자기 등을 신라와 일본에 판매했다. 장보고는 한반도 남서부 도서(島嶼)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신라와 일본을 오가며 적극적으로 무역을 했다. 일본도 이에 호응하여 다자이후(大宰府)에서 신라와 공무역(公貿易)을 전개했다.

장보고가 정쟁에 휘말려 살해되자 이 공무역은 일단 정지되었다. 장보고 선단은 문화교류에서도 한몫을 했다. 신라와 일본의 승려나 지식인 서로 왕래하거나 당에 유학할 때 교통과 숙식의 편의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옌닌(圓仁, 794~864)은 장보고를 흠모하고 은혜에 감사하는 절절한 편지를 남김으로써 일본의 신문명 도입에 신라상인이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발해는 모두 33차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고, 일본은 13차례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다. 9세기에 들어서 발해사신의 교역활동이 더욱 활발해지자, 일본에서는 “발해사신은 실로 상인과 다름없다. 상인을 빈객으로 맞는 것은 국가의 손실이다.”라는 비판조차 제기되었다.

발해는 당과 일본의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얻었다. 발해는 담비·바다표범·호랑이·곰 등의 모피, 사향, 인삼, 꿀 등이 주요 수출품이었고, 견직물, 조정의식제품(朝廷儀式祭品) 등이 수입품이었다. 교역에서는 한시(漢詩)와 같은 문화상품도 주고받았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에 편찬된 한 시문집에는 발해인의 시문이 다수 실려 있다.

유라시아대륙에 걸친 몽골제국은 중국의 인쇄술과 화약·나침반 등을 유럽에, 로마의 의약과 이슬람의 수학·천문학·역법 등을 중국에 전했다. 몽골을 통해 세계와 연결된 고려는 성리학과 수시력을 수용했다. 원의 농업서적인 『농상집요』를 받아들여 농업기술을 개선하고, 목화를 들여와 의생활(衣生活)에 혁신을 이루었다. 원-고려-일본 사이의 무역도 활발했다.

조선은 인삼, 포목, 쌀 등을 일본에 수출하고, 동, 은, 황 등을 수입했다. 일본은 금,동, 유황, 칼, 부채 등의 광물자원이나 공예품을 원에 수출하고, 동전, 도자기, 차, 서적, 회화 등을 수입했다. 선종 불교와 성리학에 기반을 둔 학문과문화가 원, 고려, 일본에 퍼진 것도 이런 교역의 덕분이었다.

명은 해금정책을 썼기 때문에 교역은 조공무역 형태로 이루어졌다. 조공무역은 사절단의 체재비와 물품운반비를 명이 부담하게 되어서, 조공하는 측이 더 유리했다. 조선은 견직물, 화문석, 고려인삼 등을 보내고, 고급 견직물, 자기, 서적, 약재 등을 들여왔다.

무로마치 막부는 사절증명(使節證明)의 일종인 감합을 소지한 선박을 명에 파견하여 도검, 창, 부채, 병풍, 구리 유황 등을 보내고, 동전, 생사, 고급직물, 서적, 그림 등을 들여왔다. 중국 동전은 일본의 화폐경제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과 무로마치 막부는 한때 사무역도 허용했으나, 사절단에 의한 공무역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를 통해 일본산인 금·은·구리·유황 등의 광산물,칼·부채 등의 공예품, 동남아시아산인 소목·후추·침향·백단·물소뿔·상아 등이 조선으로 들어왔다.

구리는 놋그릇, 무기, 화폐, 활자 등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고, 유황은 약재와 화약재로서 중용되었다. 소목은 고급염료로서, 후추는 약재·조미료로서 수요가 많았다. 일본으로 건너간 물품은 조선산인 마포·저포·면포 등의 섬유제품과 쌀·콩의 등 곡물, 화문석·호랑이가죽 등 장식품, 인삼 등의 약재였다.

그러나 공무역은 무역량이 제한되어 있어서 밀무역이 끊이지 않았다. 밀무역에서는 금, 은 같은 이윤이 많은 물품이 거래되어 중앙의 관리나 역관을 끼고 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16세기 전반에 조선의 은정련 기술인 회취법(灰吹法)이 일본에 전해진 후 일본의 은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이후 일본 사절은 대량의 은을 조선에 가져왔고, 대신 대량의 면포를 조선에서 가져갔다. 면포는 보온성이 뛰어난 옷감으로 군사와 민간 모두에서 수요가 많았다. 조선에서는 은 가격이 떨어지고 면포가 부족해지는 사태가 벌어져 일본 은의 유입과 밀무역을 억제했다.

그러나 명이 은을 빨아들이는 구조이어서 조선의 상인이나 역관들은 일본의 상인이나 유력자와 결탁하여 명으로 은을 반출하는 사례가 급증했다. 일본의 막부와 호족들은 문화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조선에 사절을 보낸 경우도 있었다.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유학이 번성한 반면 불교는 위축되고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불교가 치성(熾盛)하여 많은 사찰에서 대장경을 갈망했다. 일본은 14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까지 80여 회에 걸쳐 승려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조선에 파견하여 대장경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50부 이상의 대장경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밖에도 조선의 불상, 불화,범종 등 불교 관계 물품이 다수 일본으로 들어갔다. 조선 사절들은 일본에서 본 수차(水車)의 이용, 시장의 번화함, 화폐의 활발한 사용 등을 조선에 소개했다.

조선과 일본의 교역은 다원적이었다. 무로마치 막부 이외에 서부 일본의 다이묘와 상인이 조선에 조공하는 형식을 빌려 통상을 했다. 조선은 왜구를 방지하는 수단으로써 일본인의 교역과 어로 및 귀화를 허용했다. 공을 세웠거나 뛰어난 기능을 가진 사람에게는 관직도 주었다.

그리고 부산포(부산),제포[薺浦(웅천)], 염포(울산)를 무역항으로 개방하고, 이곳에 접대와 통상을 위한 왜관을 설치했다(1426). 쓰시마 등은 조선과의 교역에서 큰 이익을 얻었는데, 조선이 특권을 제한하면 집단으로 반기를 들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시 쇠퇴했던 교역은 조일 국교가 회복되자 다시 활기를 띠었다. 조선은 국산의 인삼과 중국산의 생사·견직물 등을 수출하고, 일본산의 은과 동(銅)을 수입했다. 조일무역은 대단히 활발하여 17세기 후반에는 일본이 쓰시마를 경유하여 조선에 지불한 은의 양이 나가사키(長崎)를 경유하여 중국과 네덜란드에 지불한 액수를 넘었다.

조선에 유입된 은은 다시 중국산 생사와 견직물과 교환되어 중국으로 들어갔다. 중계무역을 통해 조선 상인은 막대한 이익을 얻었으나  1720년대를 지나면서 조일무역은 감소했다. 일본의 은 산출량이 감소한데다가 막부의 수출통제가 심해지고, 조선에서 수입하던 인삼과 생사·견직물이 일본 국내에서 생산되어 수입대체상품이 개발된 것이다.

조일 무역의 쇠퇴는 조선의 운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이 중국이나 네덜란드 등과 나가사키를 통한 직접 거래를 강화함으로써 조선은 문명교류의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변방으로 밀리게 되었고 조선이 서양문물을 수용하고 근대화 물결에 올라타는 데 뒤처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근대의 한일교역에서는 일본제 공산품이 한국시장에 유입되고 한국산 쌀·콩과 광물 등이 일본에 들어갔다. 한국은 일본의 상품시장이자 원료공급지로 재편된 셈이다.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부가되어 교역의 주도권은 완전히 일본상인과 자본가가 장악했다.

한국병합 이후 한국은 일본자본주의 경제의 일환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한일 간의 교역은 일본 일변도로 정착되어 한국의 이출(移出)과 이입(移入)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90%가 넘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산업 격차는 더욱 벌어져서 한국내의 회사자본에서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중도 90% 이상이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에 일본이 병참기지화 정책을 추진하여 북한 지역에서는 중화학공업도 발흥했지만 대자본은 거의 다 일본인의 수중에 있었다. 한국내의 산업은 일본내의 산업과 수직적 분업구조를 이루어 업종간 불균형과 지역간 편재성이 강화되어 해방 이후 한국이 일본에서 분리되고 남북이 분단되자 한국의 경제가 급격하게 반신불수의 곤경에 빠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한국과 일본의 교역은 큰 전기를 맞았다. 한국은 청구권자금 또는 경제협력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서 무상 3억 달러, 유상2억 달러를 받아 경제개발에 의미 있게 사용했다. 나아가서 한국은 일본의자본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수출주도형의 경제발전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1965년에 2억 달러였던 한일 양국의 무역은 2010년에는 925억 달러로 폭증했다. 그 결과 한국은 일본의 세 번째 교역국이고 일본은 한국의 두 번째 교역국일 정도로 두 나라 경제는 상호의존관계가 밀접하게 되었ek.

그러나 한국 경제는 아직도 일본 경제에 대항할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여 한국이 중국과 유럽에서 본 흑자를 고스란히 일본에서 본 적자를 메우는 데 쓰는 구조가 정착된 것은 한국의 수출산업이 일본의 중간재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최근에는 일본 기업이 일방적으로 한국에 투자하는 경향에서 벗어나서 일본 기업의 자금력·기술력과 한국 기업의 시공력·추진력과 결합하여 제3국에 진출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고 전자산업이나 조선산업 등에서는 한국 기업이 매출액과 시장점유에서 일본 기업을 능가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현재 한일 양국의 경제관계는 수직관계에서 수평관계로 바뀌는 과정으로 보아야 하고 두 나라 국민의 사회의식이나 생활방식이 비슷해지면서 생활 속에서 상호수용과 일체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한일간 과거사의 정리

일의대수와 같은 바다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은 2천여 년의 역사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두 나라 모두 자신의 태반문명(胎盤文明) 위에서 시대와 세계의 변화에 적응하여 중국문명과 서양문명을 수용하여 개성 있는 문명을 창출하고 영위해왔다.

두 나라는 상대방에게 신문명을 창출하는 팩터는 아니었지만 중국문명과 서양문명을 소화하여 전수하는 메신저 역할은 충실히 수행했으나 그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문명의 전수는 저절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지만, 침략과 지배와 같은 폭력과 강제가 수반한 경우도 많았다.

한국과 일본이 문명을 전환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이동은 중요한 역할을 하여 사람이 서로 왕래하고 이주함으로써 문화의 수용과 접변이 광범하게 일어났다. 시대의 부침에 따라 등장한 도래인, 부로인, 통신사, 재조 일본인, 재일 한국인, 유학생, 사업가 등은 자발적이건 강제적이건 간에 문화의 수용과 전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양쪽 모두에게 막대한 희생과 피해를 입혔지만 이것 역시 문명을 전환하는 데 큰 계기로 작동했다. 백촌강 전투, 왜구, 임진왜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의병전쟁, 항일독립투쟁, 아시아·태평양전쟁, 6.25전쟁 등은 한일관계의 역사에 큰 마디가 되는 충격적인 사안이었다.

한국인은 역사 속에서 일본을 볼 때 흔히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고 말한다. 근대 이전에 선진문명을 전해줬는데, 근대 이후 되돌아온 것은 침략과 지배였다는 원망이 섞인 푸념이다. 물론 일본인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인들은 역사에 사로잡혀 현실과 미래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불평한다. 그렇지만 한국과 일본은 이렇게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면서 닮아가고 있는 게 진실일 것이다. 지금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는 이미 생활세계의 일체화와 상호수용이 상당 부분 진척되고 있다.

두 나라 사람들은 서로 다른 나라와 문화 속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유럽이나 미국의 제삼자가 봤을 때는 한국인과 일본인은 쌍둥이 국가 속에서 서로 비슷한 문화와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볼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역사 속에서 한국과 일본의 문명교류를 되돌아보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대단히 유용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1. 한일간 미래비전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신시대 한일관계는 미중 양강 구도로 재편되는 동아시아 국제체제 속에서 양국이 기본적 가치와 규범의 공유를 기반으로 하여 전 분야에 걸쳐 모든 행위자의 전면적인 협력의 추구를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일관계를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 양국이 향후 공동으로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이념과 가치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신시대의 한일협력을 이루기 위해서는 양국은 미래지향적 자세로 임해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 양국의 과거사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해 둔다. 즉, 한일관계에서 과거와 미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를 완전히 망각한 미래 설계도 있을 수 없고 과거에만 집착하는 미래 설계도 안 된다. 따라서 한일 신시대는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출발하여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또한 한일 신시대는 동아시아 국가 간의 관계를 국익경쟁이나 세력균형의 전통적인 구도로만 보지 않고 보다 네트워크적인 세계정치의 시각에서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즉, 한일의 긴밀한 협력관계 구축은 기존의 한미일 관계를 강화함은 물론 한중일의 우호협력 관계와도 배치되거나 모순되지 않는 방향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한일 협력의 심화야말로 향후 도래할 미중 양강(G2) 시대의 생존전략일 수밖에 없다. 즉, 한일관계의 심화, 발전은 대미, 대중관계의 강화와 선순환 관계에 있고 배타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셋째, 한일 신시대에서는 한일협력의 방향을 기존의 양자관계를 중심으로 한 사고에서 탈피하여 양자는 물론이고 한반도, 동아시아 지역, 글로벌 영역에 걸친 한일협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즉, 한일 신시대는 공간적으로 한반도, 동아시아, 글로벌 질서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관점에서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미래의 한일관계는 과거에 비해 훨씬 확장된 공간에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일 신시대의 협력은 한일 양국관계는 물론이고 한반도 차원, 동아시아 지역 차원, 글로벌 영역의 네 공간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이뤄져야 한다.

넷째, 한일 신시대는 정치-안보-경제 이슈 중심의 과거 패러다임을 넘어서서 21세기와 함께 빠르게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문화, 환경, 정보지식, 과학기술 분야의 한일 협력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한일협력의 주체는 국가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대학을 비롯해 지식계, 기업과 지방자치체 등 전 방위로 협력 관계를 확산시켜 나가는 것이 한일 양국,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 및 공생에 매우 중요하다.

퇴행적이고 편협한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ism, 自民族 中心主義)와 자국 이기주의로 인한 양국간 정치 외교적 갈등은 과거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본격 형성된 국민국가 들의 국익 우선과 영토확장을 추구한 서세동점 시기 서방 국가들의 유산이다.

국가간 개방과 협력이 필요함에도 한일 혹은 일한 양국간 우호증진과 공동이익 추구와 같이 틀에 박히고 진부하며 상투적인 클리세(Cliché)만 반복하는 정치인과 사회지도층의 언사는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베세토튜브(besetotube)라는 기념비적 프로젝트를 한·중·일 3국의 국민·인민·신민의 뜻을 모아 공동으로 연구·개발하여 다음 세기가 도래하기 전인 2099년 이전에 개통하고 노선을 점차 연장하여 아시아는 물론 미주와 유럽을 연결하는 범구관도(汎球管道)로 확장하여 천하일가(天下一家)의 글로벌 신 교통망으로 진화시킬 필요가 있다.

옛말에 백만금으로 집을 사고 천만금으로 이웃을 산다 (白萬買宅 千萬買隣)고 하였듯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웃 국가인 한중일 3국은 역사를 직시하며 미래를 지향하는 자세로 공동이익을 추구할 때이다.

18세기 이전과 같이 세계 경제의 축이 아시아로 회귀한 21세기 아시아의 핵심 당사국인 한·중·일 3국 정부는 민족주의와 패권주의를 잠시 내려놓고 진정 서로 이해하고 협력함으로써 3국의 국민·인민·신민이 함포고복(含哺鼓腹)하는 동아시아 운명 공동체를 구축하여 후기 산업화 시대, 탈산업화 시대, 탈석유시대를 거쳐 생태사회가 될 21~22세기 모범적인 생태 패권국으로 거듭나야 한다.

Post Author: beseto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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