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이냐, 해양이냐… 한국, 양자택일 넘어선 新지정학 고민해야

[‘시대의 지성’ 이어령이 말하는 한국의 다음 100년]

[1]한반도와 아시아의 新지정학

대륙과 해양 사이에 낀 한반도, 미·중 밀월 ‘차이메리카 시대’ 끝나
새로운 지정학적 도전에 직면… 100년의 운수는 사주 아닌 지도에
한·중·일 세 종류의 밤 품종 교배… 맛 좋고 병충해 강한 대보밤 만들어
이같은 양자병합의 해법 찾아야

  • 종래의 동전 던지기식 대결 아닌 가위가 보, 보는 주먹을 이기듯
  • 한·중·일 모두 승자가 되는 ‘삼항 순환’ 구조로 나아가야
  • 중국과 일본 사이 통일된 한반도, 대륙·해양의 균형 이룰 수 있어… 만주 중심으로 새로운 장 열릴것

우리 시대의 ‘대표 지성(知性)’으로 꼽히는 이어령(86) 전 문화부 장관이 한국·한국인이 맞을 다음 100년의 과제를 제시했다. 지정학, 생명·과학, 문화·교육 세 가지 측면에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 키워드를 제안했다.

작년 3월 출범한 ‘조선일보 100년 포럼’ 위원인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정과리 연세대 교수가 분야별로 대담을 맡았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지난해 말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염재호 조선일보 100년 포럼 대표를 만나 한국의 다음 100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어느 한편을 선택하기보다 대륙·해양 세력을 어우를 창조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오종찬 기자

대담:염재호 100년 포럼 대표

염재호-새해에도 나라 안팎에서 심각한 도전과 위기에 직면할 전망이다. 올해 한국 사회가 당면한 도전과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나.

이어령-제야의 종이 울리고 새해가 되면 달력을 본다. 사람들은 연(年)·월(月)·일(日)·시(時) 시간의 네 기둥인 ‘사주(四柱)’를 보고 미래 운세를 점친다. 하지만 우리가 가야 할 100년의 운수는 사주에 없는 ‘5번째 기둥’에 있다. 달력이 아니라 지도를 봐야 한다.

광활한 대륙과 왕양(汪洋)한 바다 사이에 낀 한반도에 우리가 있다. 반은 바다(섬), 반은 대륙이라는 이중적인 정체성으로 우리에게 국난의 위기는 항상 지정학적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호마(胡馬)를 탄 ‘대륙 세력(land power)’은 호란(胡亂)을 일으켰고, 양선(洋船)을 타고 온 ‘해양 세력(sea power)’은 양요(洋擾)를 낳았다.

-근대화의 대변혁이 일어나던 20세기 초와 비슷한 느낌이다.

-2020년 새해 아침이 밝았지만, 100여년 전 구한말 때와 거의 시차가 없다. “대륙 국가냐, 해양 국가냐”라는 외통수 질문을 앞에 두고 떡국 한 그릇 편안히 먹을 수 없는 상황이다.

세계지도를 보면 실크로드를 타고 동진(東進)한 유라시아의 대륙 세력과 지중해에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돌아 서쪽으로 항해한 해양 세력이 서로 맞부딪친 곳이 바로 한반도이다. 대륙·해양 세력이 갈리는 경계선이 DMZ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역사는 강대국 사이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특성에 크게 좌우됐다.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로 새로운 국제 질서가 불확실한 상황이다.

-지금 한국은 미국 주도의 해양 세력과 중국 중심의 대륙 세력이 격돌하는 접점에 있다. 이런 상황 변화는 1980년대 말부터 30년 동안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이종 교합으로 탄생한 ‘차이메리카(Chimerica)’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후엔 자본주의가 중국을 구했고, 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엔 중국이 자본주의를 구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중 간 상호 의존은 비약적인 경제성장과 평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과 모리츠 슐라리크가 창안한 차이메리카란 단어는 불행하게도 머리는 사자, 몸통은 양인 신화 속 괴물 ‘키메라(Chimera)’로도 읽힌다. 일부 경제학자는 미·중 경제동맹을 두고 “한 배우자는 저축과 투자를 하고, 다른 배우자는 소비만 하는데 어느 쪽도 감히 이혼할 수 없는 커플”에 비유하기도 했다.

결국 비정상적 커플은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2016년 즈음 파경을 맞았다.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이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 되면서 무역 분쟁, IT 분쟁, 북핵 안보 문제 등 긴장과 갈등이 고조됐다.

사실 미·중 관계 변화의 근본적 배경엔 미국의 ‘셰일 혁명’이 있다. 기술 발달로 셰일오일·가스 생산량이 늘고, 유가(油價)가 안정되면서 중동 지역 등으로 분산되던 미국의 관심이 중국 등 아시아로 집중된 측면이 있다. 게다가 북한 핵 문제가 등장하면서 한반도가 국제사회에서 지정학적 중심축(pivot)으로 부상했다.

염재호(오른쪽) 대표는 “한반도가 통일되면 과거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국제 정치와 세계 경제의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라고 했다. /오종찬 기자

-지정학적 특성이 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면, 당장 직면한 문제는 무엇인가.

-지난해 한국과 일본의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갈등도 지정학적 국제 변화와 깊숙이 얽혀 있다. 지소미아의 핵심은 한국이 해양 국가냐 대륙 국가냐를 묻는 말과 다르지 않다.

미국 중심의 해양 세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통상 ‘다섯 개의 눈(Five Eyes)‘이라고 불리는 미국·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를 잇는 정보 공유 체계 ‘UKUSA’이다.

해양국의 중추인 영국과 미국을 결속시키는 게 UKUSA이고, 대서양 중심의 해양국과 아시아의 해양국을 잇는 선이 바로 지소미아인 것이다. 반대로 러시아가 가스관이라는 에너지 라인으로 독일·중국 등 대륙 국가들을 묶으려는 움직임을 생각해보라. 이 모두가 해양 국가냐 대륙 국가냐의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질문이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한국의 미래 운명을 가를 수 있다.

-한민족 5000년 역사는 중국과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러나 근대화 이후 우리 역사는 일본과 미국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패러다임 변화는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개화기 때 우리는 처음으로 바다를 향해 항구를 열었다. 최남선은 신체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통해 바다의 힘을 노래했고, 그가 창간한 소년지에는 바다를 주제로 한 문학 작품들이 등장한다.

이후 한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해양 드라이브를 걸었고, 무역과 해양 문화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오늘날의 기적과 같은 경제적 번영을 일구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이 새롭게 긴장 관계를 조성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이클 그린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은 이미 2014년 “한국은 해양국이냐 대륙국이냐 응답하라”는 글을 발표했다. 대륙국이라고 하면 지금까지 함께한 중요한 동맹(미국)을 잃는다. 해양 국가라고 하면 중국의 노여움으로 한반도에서 미·중 긴장과 갈등이 고조될 것이다. 둘 다 거부하면 고립되고, 어느 한쪽에만 서면 갈등과 화를 부른다.

해양·대륙 사이의 반도에서 사는 한국인은 여름밤 “바람이 들어오게 창문을 열라”는 아버지와 “모기 들어오니 창문 닫아라”는 어머니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처지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분쟁과 화를 모면할 수 없다.

하지만 창문에 방충망을 달면 바람은 들어오고 모기를 막는 새로운 해법을 창조할 수 있다. 한쪽 편에 줄 서는 선택이 아니라 양쪽 모두를 품는 창조성이 외통수를 넘어서는 생존 방식이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대륙이냐 해양이냐”는 ‘양자택일'(either-or)을 탈(脫)코드화하여 양자병합(both and)으로 가는 창조적 해법을 구축하는 길이다. 우리나라가 수십 년 공을 들여 한·중·일 세 종류의 밤[栗] 품종을 교배해 맛도 좋고, 병충해에도 강한 신품종 ‘대보(大寶) 밤’을 만들어낸 것과 같다.

-대륙과 해양 세력을 모두 품는다는 것은 어떤 개념인가.

-독일의 프리드리히 라첼은 생존권 사상을 바탕으로 대륙지정학을 펼쳤고, 미 해군 제독 앨프리드 머핸은 ‘해양력’의 개념으로 해양지정학을 창안했다. 영국의 해퍼드 매킨더는 유라시아의 개발로 해양·대륙의 세(勢)가 교체된다는 ‘세계 섬‘ 이론을 제시했다.

일본의 고토 신페이(後藤新平)는 지정학 이론을 아시아 식민지 지배에 이용했다. 20세기 모든 지정학 이론과 행위는 군사·정치·경제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전략으로, 한쪽이 죽어야 다른 쪽이 사는 포식주의 원리다.

21세기 아시아 중심의 신지정학을 구축하려면 종래의 ‘동전 던지기식’ 대결이 아닌 한·중·일 3국이 ‘가위바위보’의 ‘삼항 순환’ 구조로 나가야만 한다. 보자기는 주먹을 이기고, 가위는 보자기를 이기고, 다시 주먹은 가위를 이기는 순환 구조에선 승자만이 존재한다.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북한 변수가 없으면 한국이 앞으로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했는데, 북한 문제만 창조적 해법으로 잘 넘긴다면 세계지도를 바꾸는 꿈의 100년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엔 상상하기도 어려운 처절한 상황이 될 수 있다.

-만약 한반도 통일의 길이 열린다면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의 동북 3성, 이전의 만주를 중심으로 국제정치 및 경제의 새로운 장이 펼쳐질 수 있지 않겠나.

-의자는 한 다리나 두 다리로 설 수 없다. 대륙 세력의 중국, 해양 세력의 일본 사이에 통일된 튼튼한 한반도가 나타날 때 비로소 해양·대륙에 균형이 잡히고 상생의 길이 열린다. 훈춘 같은 지역은 한국·중국·러시아가 어울리며 동해와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유라시아와 대륙과 영국·미국·일본·한국의 해양 라인이 접속되는 한반도 중심의 신지정학 시대가 실현된다.

-21세기 한국의 운명이 신지정학에 달렸다는 생각에 깊이 공감한다. 미국·중국·일본·북한 등 주변국과의 외교와 효과적인 정책적 대응이 더욱 중요해질 것 같다.

-새해인 만큼 덕담을 하자. ‘임도 보고, 뽕도 따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우리 속담이 신지정학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고래 싸움을 말려야 새우 등이 터지지 않는다. 한반도는 토끼도 호랑이도 아닌 용만큼 크고 센 ‘수퍼 새우’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1/01/2020010100257.html

Post Author: beseto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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