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영구평화론과 세계시민사회론 및 베세토·글로벌튜브

  1. 영구평화론(Zum ewigen Frieden)
  2. 칸트의 세계시민 사회
  3. 세계시민 사회 담론
  4. 세계시민주의와 베세토·글로벌튜브

  1. 칸트의 영구평화론(Zum ewigen Frieden)

 

독일 철학의 효시이자 비판 철학의 창시자인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모든 이론은 이성에 입각한 이론이다. 저서 중 하나인 “순수이성 비판(純粹理性批判, Kritik der reinen Vernunft)”은 이성 그 자체가 지닌 구조와 한계를 연구하여 형이상학을 학문(science)으로서 정립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윤리학을 집중적으로 다룬 “실천이성 비판(實踐理性批判,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과 미학, 목적론 등을 연구한 “판단력 비판(判斷力批判, Kritik der Urteilskraft)”은 그의 대표작으로 당시는 중세 철학이 막을 내리고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던 계몽주의 시기였다. 그의 철학은 인간 지성의 능동적이고 자발적 능력을 강조한다.

칸트에 의하면, 전쟁은 국가간 혹은 주권자의 권력욕과 영토적인 야심을 근본 원인으로 보았다. 정치와 도덕의 일치를 평화의 근본조건이라고 보았으며 인류가 역사의 어느 시기에 가서는 항구적인 평화상태에서 살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칸트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희망적이고 낙관적이었고 영구평화론은 도덕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칸트는 세계의 영구평화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공화제’를 바탕으로 국내의 각 인간에게(시민법), 각 국가 사이에(국제법), 그리고 세계 인류 사이에 법(세계시민법)의 지배를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대하여 헤겔은 군주연맹체로 그 당시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영구평화론은 국제정치 현실에 대한 개념적 인식이 아니라 주관적인 소망에 근거한 것으로 보았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도덕론에 의하면 전쟁은 악(惡)이며 영구평화(永久平和)야말로 인류가 도달해야 할 의무였다. 전쟁이 인격의 품위를 파괴하고 자유를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유한한 인간에게 있어서 영구평화는 영원한 과제로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조건을 제안한 것이 이 저서이다.

칸트는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인 1795년 4월 프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바젤 조약(Basel Treaty)은 평화를 위한 확실한 보장에서 거리가 먼 휴전 조약이라고 비판하면서 진정한 영구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가상적인 평화 조약안을 제시했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질문이 “영구 평화론”으로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물론 국제 평화에 대한 칸트의 정치적 사유는 그만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다. 생 피에르(Abbe de Saint-Pierre)와 루소(Jean Jacques Rousseau) 등에 의해서 진행된 18세기 유럽의 국제 질서에 대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영구 평화론”을 저술한 것이다.

칸트는 영원한 평화만이 정치상의 최고선이며, 인류가 이성을 지니고 있는 한 계속 노력해야 할 ‘도덕적 실천’ 과제라고 논했다. 따라서 그의 ‘영구 평화론’은 단순한 법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정치 철학적 토대에 근거하고 있다.

1) 영구평화론의 개요

“영구 평화론”은 평화 조약안이기 때문에 일반 저술과 다른 구성을 갖고 있다. 본문은 평화 조약의 체제를 따라서 예비 조항(6항), 확정 조항(3항), 추가 조항(2항), 부록(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국가 간의 영구적인 평화를 위한 예비 조항’을 통해, 국가 간 적대 행위의 휴전이 아닌 종식을 뜻하는 평화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설명한다. 영구 평화의 실현에 장애가 되는 6개의 금지 조항을 제시하고 있다.

전쟁을 야기할 비밀 조항 금지, 다른 국가로의 강제적 통합의 문제, 상비군의 점진적 폐지, 국채 발행 금지, 내정 간섭 금지, 비열한 적대 행위의 금지 등이다.

제2장은 ‘국가 간의 영구 평화를 위해 확정된 조항’ 3개를 바탕으로 영구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건을 논하고 있다. 영구 평화를 위한 제1확정 조항은 각 국가의 시민적 체제는 공화 체제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세 단계의 논리적 추론 과정을 거친다. 첫째 한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으로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원리, 둘째 모든 구성원이 유일 공통적인 입법에 시민으로서 종속된다고 하는 원칙 , 셋째 모든 구성원이 국민으로서 평등하다는 법칙, 이 세 원칙에 기초하여 설립된 체제로 이러한 체제가 ‘공화적 체제’인 것이다.

여기서 칸트는 루소의 ‘일반의지(volonté générale)’의 자기 입법으로서 인민의 직접적인 통치를 사실상 거부한다. ‘대의적 공화정체’가 정치 권력과 일반 의지의 일체성이 자의적 지배로 귀결될 수 있는 ‘민주정체’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이다.

모든 전쟁을 영구히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제 민족 간의 평화동맹’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각 국가는 공화적 체제에서 각자의 권리를 보장받고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였으며 이는 오늘날 국제 연합을 만드는 토대가 되었다.

영구평화를 위한 제2 확정 조항으로 국제법은 자유로운 제 국가의 연방제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인간의 사악함을 규제하기 위해 정부의 공법(公法)이 필요하듯, 국가 간의 전쟁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법적 구속력으로서의 국제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유로운 국가들의 상위에 특별한 종류의 연맹으로 평화연맹(foedus pacificum)을 제시한다. 세계 공화국(세계국가, 세계정부)이라는 적극적인 이념 대신에 소극적 대안으로서 연맹을 제안한 것이다.

영구평화를 위한 제3 확정 조항으로 세계 시민법은 보편적인 우호를 위한 제반 조건에 국한되지 않으면 안된다. 세계 공민법의 입장에서 모든 국민의 상호 ‘방문권’의 확립을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열강의 식민지 경영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우호의 조건이란 이방인이 낯선 땅에 도착했을 때 적으로 간주되지 않을 권리를 뜻한다. 이런 우호 조건을 수용할 때 세계 각 지역이 서로 평화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고, 이런 평화로운 관계가 공법(公法)으로 뒷받침되면 인류는 세계 시민적 체제에 점차 다가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권리는 모든 인간에게 속해 있는 권리인데, 과거 유럽의 문명국가들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등지의 정복 과정에서 보여 준 야만에 대한 자성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칸트가 구상한 영구 평화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는 미완의 숙제다.

그리고 칸트는 제1 보충 조항을 통해 “영구 평화를 보장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위대한 기교가인 자연이다”라고 말한다. 이때의 ‘자연’은 인간의 이성적 의지와 도덕적 본능과 같은 ‘섭리’를 뜻하기도 하고, 실존적 자연을 의미하기도 한다.

칸트는 인류 역사가 전체적으로 자연의 은밀한 계획에 따라 도덕적 완성과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완전한 국가 조직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칸트는 1796년에 ‘영구 평화를 위한 비밀 조항’을 추가하여, 각 국가들은 행동 원칙에 관해 철학자들의 충고를 받아들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칸트의 영구평화는 도덕 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영구 평화론” 부록은 정치와 도덕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그의 실천 이성은 인간을 합목적적인 도덕적 존재로 다루고 있는데, 도덕적 존재란 이성적 존재의 행위가 선의지와 의무에 결부된다는 것이다.

칸트의 기본 태도는 도덕을 근거로 하지 않으면 참다운 정치는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정치는 인간의 권리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어야 하며, 비록 더디긴 해도, 정치가 계속 끈기 있게 광채를 발휘할 단계에 이르기를 희망하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와 도덕의 갈등은 단지 주관적으로 존재할 뿐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정치적 행위를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법적 의무’와 결부시킨 것도, 그가 정치와 도덕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음을 보여 준다.

영구평화는 절대 공허한 이념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해결되면서 지속적으로 목표에 접근해 갈 하나의 과제”라고 끝맺고 있다. 칸트의 ‘영구 평화론’은 관념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전통에 근거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을 입증하고자 했던 점이 높게 평가된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국제법이 헌법화됨으로써 스스로를 넘어 세계시민권으로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국제법은 “상호관계 속에 놓여 있는 국가들과 연관되어 있는 반면, 세계시민권은 인간들이 “보편적인 인간 국가의 시민들로 간주될 수 있는 한 인간들 사이의 법적 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세계시민주의는 국민주의에 대척하는 것으로 현존하는 여러 국가가 해소 혹은 개혁되어 국가간의 대립과 항쟁이 없어지고, 유일한 세계연방이 실현되어 전 인류가 그 시민으로 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이상주의를 말한다.

칸트의 세계시민사회론은 세계국가보다는 국가들의 연합이나 동맹에 입각하여 세계시민사회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는 민족의 문화적 특수성과 국가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국가들 사이의 정의를 실현해가는 점진적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그의 세계시민사회라는 이념은 국가들의 자율성에 규제적으로 관여하는 것으로서, 국가법과 국제법을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그의 이런 입장은 오늘날 세계화가 더불어 전개되고 있는 경제적 식민화, 문화적 식민화에 저항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기존의 국민(민족)국가들 사이의 갈등을 넘어 조화를 모색하는 세계시민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칸트의 세계시민사회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이론이 될 수 있다.

2) 칸트의 3위일체법

칸트는 법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① 한 인민 집단 안에서의 인간들의 시민법(ius civitatis) ② 국가들의 국제법(ius gentium)세계시민법(ius cosmopoliticum). 이중에서 세계 시민법은 개인과 국가들을 모두 규제하는 법으로서 이들 상호 관계에서 모든 개인을 직접 “보편적 인간 국가”의 시민으로 간주한다.

칸트는 이 삼분된 법 체제를 당대의 법 상태로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영구평화의 이념”과의 관계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이것은 장차 점진적으로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오늘날 혼동될 수 있는 것은 국가를 규제하는 국제법과 개인도 규제하는 세계시민법이다.

오늘날 국제법은 이 두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 즉 국가를 권리, 의무의 주체로 보고 국가 간의 관계를 규제하는 보통 국제법과는 다르게 국제법상의 해적 법규와 하이재킹 금지법은 개인, 단체, 국가를 가리지 않고 처벌하는 강행 법규다.

또한 2차 세계대전 후에 새로 생긴 국제 법규인 ‘인도에 반한 죄(crime against humanity)’로서의 ‘평화에 대한 범죄’와 ‘집단살해죄(genocide)’도 이에 책임이 있는 국가, 개인, 단체를 가리지 않고 처벌하는 법규다.

그 밖에 국제법적 차원에서 국가에 의무를 지워 개인이 속한 국가에 대항해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유엔헌장〉의 인권 조항, 〈국제인권협약〉, 〈유럽인권협약〉 등이 있다. 이 법규들은 모두 칸트적 의미에서 세계시민법이다.

칸트는 “영구평화론(Zum ewigen Frieden)”(1795)에서 이 세 법 체제의 구분에 따라 국내사회, 국제사회, 세계시민 사회를 영구평화를 위해 개편할 것을 제안한다.

오늘날 제국주의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평화에 대한 현실적인 요청이 강력해졌다. 현대 사회에서 국제기구가 현실화되고, 국제적 평화의 이념이 중요해지면서 “영구평화론”은 이전에 비해 더욱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3)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영구평화의 양립 불가능성

칸트가 살던 시대는 정치와 경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중상주의 경제체제였다. 칸트가 “영구평화론”에서 제기한 경제와 관련 부분은 오직 상비군과 관련된 부분과, 상업적 정신에 의해 세계시민의 이념이 확대된다는 부분이다.

칸트가 살았던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경제 체제는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되어 있다. 자본주의 체제 이전의 경제체제는 정치 영역에 포섭되어 있었고, 정치영역에 의해 규제당하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정치영역과 경제영역을 분리시켰으며, 오히려 사회의 제 영역이 경제 영역에 포획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의 정치적 결정은 시장의 원리에 의해 좌우되고 대부분의 사회적 영역은 시장에 포획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칸트가 제시한 영구평화의 체계가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자유와 평등을 선전하는 자본주의 경제는, 시장의 차가운 논리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기반을 철저히 파괴시켰다. 자본주의 체제하의 국가 간의 관계란, 더욱 복잡하다. 각 국의 경제적인 여건은 자연적, 역사적, 사회적 요인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천차만별로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경제적인 양극화와 극단적인 빈곤은 자본주의적 자유에 의해 정당화된다. 오히려, 경제적인 힘을 가진 나라는 그를 이용해 타국에 압박을 가하거나, 경제적 힘이 취약한 나라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원한 평화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단순히 예비조항의 숫자와 항목을 더 늘리는 것만으로 이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필연적으로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계급 간의 대립 역시 관념적인 형태가 아닌, 현실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이러한 계급적인 대립과 갈등은 평화상태라고 할 수 없다.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노동자들은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태동기에,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자본가를 위해 잉여를 생산해야만 했다.

맑시즘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날의 상황도 그 때의 상황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며, 자본가들의 임금삭감이나 무차별한 해고 및 고용 불안정의 상태에 항상 ‘불안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는 충분히 폭력적이다. 초국적 기업은 제 3세계의 노동자들을 헐값으로 착취하여 그들의 경제 성장의 동력으로 삼고 있으며, 자본의 논리는 수많은 빈민들과 노동자들을 고통의 나락으로 빠지게 하였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계급 문제와 계층간 투쟁 문제는 칸트의 체계만으로는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된다. 때문에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 하에서 영구평화 문제는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의 대안적 이론으로 중용(中庸) 철학적인 제3의 길(Third Way)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필요할 것이다.

4) 영구평화론은 탁상공론인가?

칸트는 자신의 구상을 단지 ‘철학자들의 탁상공론’ 이라고 생각했을까? 그가 서문에서 보이는 조심스러운 태도나, 비밀조항에서 붙인 유보적인 조항들은 철학과 정치 영역의 구분을 어느 정도 전제하고 있어 일견 탁상공론처럼 비유된다.

하지만 칸트는 자신의 구상을 통해 영원한 평화가 진실로 찾아올 수 있음을 강하게 믿고 영원한 평화의 실현 가능성을 주장했다. 그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 도덕 법칙을 존경하며 ‘공법 상태를 실현하는 것’을 의무로 삼고, 공법 상태가 실현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면, 영원한 평화를 이루는 것이 결코 헛된 이상은 아니라고 하였다.

다만, 영원한 평화가 급진적 혁명이나, 금지와 규제를 통한 일시적이고 급작스런 변화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인 여건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 영원한 평화에 대한 의식적인 추구와 인간의 노력, 그리고 이를 확고히 하는 자연의 보증을 통해, 비로소 영원한 평화는 달성 될 수 있을 것이다.

 

  1. 칸트의 세계 시민사회

 

칸트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하나의 통합된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인류를 구성원으로 하는 보편적 공동체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선구자이다. 그는 현존하는 세계질서를 비판할 수 있는 규범적 토대이자 인류가 추구해야 할 세계질서의 원칙으로 ‘세계시민사회이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현대는 칸트의 말대로 ‘계몽된 시대’가 아니라 아직도 ‘계몽 중인 시대’다. 국내 체제가 ‘반성적 근대화’, 즉 ‘제2단계 근대화’에 들어갔다면, ‘주권의 약화’가 이제 막 개시된 국제 관계 분야에서는 이제야 ‘제1단계 근대화’의 시대가 찾아 들고 있다.

이른바 ‘탈근대적’ 국제 정치관은 주권의 세계 시민적 약화를 겨냥한 칸트의 계몽 이념에 대해 무지한 ‘허언’이든가 아니면 계몽과 가속화되는 근대화의 진전에 대한 급진적 요구이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세계 시민적 근대 기획은 앞에서 칸트의 계몽 이념에 따라 입증하고자 한 대로 아직도 미완의 상태에 있고, 세계사는 세계화 속에서 근대화의 궤도를 가고 있다.

칸트의 말대로 세계 시민적 공론을 향한 국가 행위의 공개성이 행위의 정의, 합법성 및 세계 시민적 공법성을 보증하는 ‘본질 구성적’ 형식이라면, 세계 시민사회와 세계 공론의 발전만이 단위 국가의 국제 연합의 세계 시민적 성격과 인권 이념을 강화하는 길이다.

초보적 세계 시민 사회의 존재는 이미 경험적으로도 확증할 수 있다. 세계화는 ‘세계적 경쟁의 심화’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양식의 변화’이기도 하다. 경제적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경향’을 뛰어넘는 것이다. 금융 시장은 이미 ‘완전히 세계화된 경제’다.

세계화는 신우익의 ‘신화’가 아니라 ‘현실’이다. 세계화는 획기적으로 새로운 현상이다. 또한 세계화는 경제 현상일 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의 ‘사회적’ 세계화다. 먼 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이전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역으로, 개인적 선호조차 세계적 파급을 낳는다. 커뮤니케이션 혁명과 정보 기술의 확산은 세계화 과정을 급격히 추동하고 있다. 이로 인해 주권은 이제 ‘당구공’이 아니며 서로 삼투한다. 주권들의 상호 삼투를 통해 개인들의 일상생활이 급변하고, 새로운 초국가적 체계와 세력들이 생겨난다.

동시에 세계적 통신 및 정보 교류 및 인적 교류 및 국제 협력의 증대와 함께 세계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국제 협력 기구의 수가 폭증하고 있다. 20세기 초에는 겨우 20개의 정부 간 국제기구와 180개의 초국가적 비정부기구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300개의 정부 간 국제기구와 약 5,000개의 초국가적 비정부기구가 존재한다. 결국 ‘세계적 시민 사회(global civil society)’가 이미 존재하고 있고 이에 대응하는 ‘세계적 관리 기관(global governance)’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경’이 ‘보다 막연한 프런티어’로 변하면서 엄격한 국경을 가진 ‘영토 국가’로서의 국민 국가는 본질적으로 변형된다. 중세의 국가들은 국경이 아니라 프런티어를 가졌었다. 이제 다른 이유에서, 그리고 다른 의미에서 나라의 국경이 다시 프런티어로 변하고 있다.

세계 시민사회가 초보적으로 존재하는 오늘날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주권성을 내세우며 국제 정치에서 무법적 자유와 야만을 구가할 수 없다. 또한 오늘날 어떤 국가가 칸트의 세계 시민적 보편성 주장, 즉 보편적 인권의 가치 주장을 서구중심주의로 매도하고 자국의 인권 침해를 문화적 특수성을 이유로 정당화한다면 그것은 논리적 자가당착인 것이다.

서구중심주의라는 논거는 인권 이념을 서구중심주의로 매도하는 나라에서 자행되는 전근대적인 인권 유린적 관행을 정당화하는 위험과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문화적 특수성이라는 논리의 핵심은 자국 문화의 특수성을 주장함으로써 서구 문화의 보편성에 대한 부인을 통해 서구 문화에 대한 자국 문화의 대등성을 주장하는 데 있다.

이 논리는 이러한 문화적 동등권 주장을 통해 서구 문화의 산물인 인권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자국 문화 속에 내포된 인권 유린 요소를 정당화한다. 이 문화적 특수주의 논리는 서구 문화와의 동등성 주장을 뜻하는 한 결국 자국 문화가 적어도 동물들의 문화가 아니라 서구인과 ‘동일한’ 인간들의 문화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민족의 보편적 동등권을, 즉 특수주의 논리로 부정하는 세계 시민적 인권을 자가당착적으로 요구하는 셈이다. 문화적 특수주의는 이와 같은 자가당착적 결론에 도달한다. 세계 시민적 인권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문화에 대한 중대한 오해의 소산이다.

근대 문화는 적어도 세 개의 차원으로 분화되어 있다. 이른바 정치 문화(politische Kultur), 민족 문화(ethnische Kultur), 개인 문화(persönliche Kultur)가 그것이다. 이 분화된 문화 영역들은 서로 무관하지 않고 요소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치지만, 제각기 고유한 내용을 중심으로 분립되어 있다.

각국의 정치 문화는 근대의 개막과 함께 민족 문화에서 분화, 형성된 것으로서 근대의 보편적 가치와 ‘내적’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각국의 정치 문화는 각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인권을 인정하고 민주적 토론 질서와 합의 방식을 수락하며 국제법, 국제 관행에 따라 서로 관계된다.

특정 국가의 정치 문화는 인권, 민주주의, 공론의 발전 정도와 세계 시민적 가치 개방의 정도가 높을수록 수준이 높은 것이다. 따라서 정치 문화의 고유 사항인 인권과 민주주의의 문제는 대체로 민족 문화의 특수성 논리로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다.

만약 근대적 정치 문화의 발전이 민족 문화의 어떤 요소에 의해 저해된다면, 이 저해 요소는 민족 문화 속에 침전되어 전수된 전근대적 정치 요소로 근대화를 위한 정치 혁명의 대상이 될 것이다.

민족 문화는 정치 문화의 보편적 ‘내용’을 독특한 민족 문화적 색조로 채색한다. 그러나 이 특색을 의식적으로 추구할 필요는 없다. 민족 문화의 특색은 지리와 풍토, 음식과 취향, 습관과 풍속, 풍류와 쾌락의 발전과 재창조가 다르기 때문에 자연히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 문화적 특색을 ‘의식적으로’ 강조하는 순간, 은연중에 세계 시민적 보편 가치에 저항하는 정치 병리적 히스테리와 외국 문화에 대한 퇴행적 경계심이 싹트게 된다. 이제 우리는 세계주의적 자세와 타문화에 대한 관용의 덕목을 개발해야 한다.

바로 이런 시대에 민족주의적 반외세주의는 쇠망에 이르는 시대착오에 불과하다. 우리 체제가 다문화주의적·세계주의적 개방성을 갖추더라도 우리의 종교, 언어, 풍속을 중심으로 짜인 특색 있는 민족 문화의 ‘자연적’ 재창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이미 다종교의 오랜 생활 경험을 통해 다문화주의와 세계주의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 ‘언어와 종교’ 등 문화에 의해 자연적으로 구분된 국가들의 사해동포적 연합을 추구하는 칸트의 세계 시민법 이념은 ‘지배 문화’에의 동화가 아니라 ‘다문화’를 예고하는, 분리와 통합의 변증법을 담고 있는 것이다.

 

  1. 세계시민사회 담론

 

세계시민주의 (世界市民主義, Cosmopolitanism) 또는 사해동포주의 (四海同胞主義)는 이성을 공유하는 것으로서, 전 인류를 동포로 보는 입장으로 그리스어 κόσμος(kosmos, 세계)와 πολίτης(polites, 시민)에서 유래된 κοσμοπολίτης(kosmopolites, 세계의 시민)에서 유래되었다.

세계시민주의의 개념과 역사는 정치사상만큼 오래 되었다. 세계시민주의의 기원은 B.C. 4-5세기 사이에 고대 그리스의 키니코스(Cynicos)학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시민주의는 오랜 고대 그리스시대에 고안된 용어이지만, 오늘날에도 잘 어울리는 개념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사실 세계시민이라는 개념은 고대에도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의 디오게네스 (Diogenes)는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세계시민(cosmopolites) 이며, 세상이 내 도시(국가)” (Diogenes, VI -63) 라고 말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도시도 없고(apolis) 집도 없고(aoikos) 조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우주에 있는 국가를 진정한 국가로 여기고자 하는 태도를 내포한다.

고대 로마의 키케로(Cicero) 역시 이 세상이 신들과 인간들에게 공통된 단일 국가라고 생각하면서 “동료시민들에게는 올바른 원칙을 적용하면서 외국인들에게는 그렇게 못하겠다는 입장은 인류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연대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근대 철학자 칸트(Kant) 역시 야만상태로부터 문명상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구성하는 것이 불가피하듯이,국가들 사이의 자연적 자유상태인 전쟁상태로 부터 평화상태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세계시민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세계시민사회 형성은 한 국가가 내부에서 자연상태를 벗어나 문명상태를 구축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각 국가는 자신의 고유한 자주권과 자립권을 갖고 있으며 국가들 사이에 국내에서와 같은 주권자와 국민의 관계가 설정되면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종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국가들 사이의 관계는 일시적인 전쟁을 끝내는 평화조약(pactum pacis)을 넘어서 영원히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평화연맹(foedus paccum)’을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지금 우리는 지구촌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지구촌 세계를 살아가면서 종족 민족적, 종교적 전통을 살아가며 넘나드는 교류 속에서 활기차게 세계의 상식을 창조하고, 타자의 다름을 인정하도록 정신을 일깨우고, 일면적 관점에서 세계시민적 시야로 지평을 전환할 것을 그 어느 때보다 요구 받고 있다.

독일 철학의 효시이자 비판 철학의 창시자인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모든 이론은 이성에 입각한 이론이다. 당시는 중세 철학이 막을 내리고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던 계몽주의 시기였다. 그의 철학은 인간 지성의 능동적이고 자발적 능력을 강조한다.

칸트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하나의 통합된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인류를 구성원으로 하는 보편적 공동체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선구자이다. 그는 현존하는 세계질서를 비판할 수 있는 규범적 토대이자 인류가 추구해야 할 세계질서의 원칙으로 ‘세계시민사회이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의 동심원이 아니라 여러 동심원, 즉 가족, 도시, 민족, 국가, 인류 공동체 등 다양한 공동체로 이루어진 삶의 공간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동심원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충돌할 때 어느 것에 우선적인 도덕적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지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에 부딪친다.

세계 국가를 세우려는 극단적인 세계시민주의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세계시민주의는 다양한 동심원을 인정하기 때문에 특정 지역이나 국가에 대한 관심이나 충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세계시민주의는 가장 중요한 동심원이 인류 전체이고 따라서 인류 전체나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에 대한 충성이 일차적이라고 본다.

모든 인간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출신 지역이나 국가에 따라 차별 대우를 받지 않고 세계시민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시민주의는 보편주의 관점에서 인권과 같은 보편적인 기본 권리와 더불어 인류애의 관점에서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을 중시한다.

그런데 대체로 공동체주의는 세계시민주의와는 다르게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를 부정하면서 특정 공동체에 타당한 특수한 윤리 규범을 인정하며,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과 헌신보다는 특정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연대성, 사랑, 헌신을 더 중시한다.

따라서 이러한 공동체주의는 세계시민주의와 양립하기 어렵다. `다원적 공동체주의`와 `다원적 세계시민주의`는 지역적 공동체성과 더불어 세계시민성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서로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복수의 공동체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이 서로 충돌할 경우에 어떤 공동체의 가치를 더 우선시할지에 대해서는 서로 입장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양자는 더 이상 가까워지기 어렵다. 세계시민주의는 공동체주의보다는 자유주의와 양립 가능성이 더 높다.

자유주의는 보편적 권리를 인정하고 그것의 차별 없는 평등한 적용을 주장하는데, 이것을 국가를 넘어서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 적용한다면 자유주의는 세계시민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실제로 이러한 자유주의의 관점을 국내에만 적용시킬 뿐이고 세계적 차원까지 확대 적용시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세계시민주의자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자유주의적 세계시민주의`는 `급진적 세계시민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인류애를 요구하기 때문에 해외 원조에 소극적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국경선에 따른 원조 수준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급진적 세계시민주의와는 입장 차이를 보인다.

세계시민적 관점이란 문화적 타자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거기서 각 개인의 생존 이해를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세계시민주의는 유럽 근대성의 위대한 이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족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신자유주의라는 역사적 괴물을 뛰어넘는 것을 뜻한다.

 

  1. 세계시민주의와 베세토·글로벌튜브

 

1980 년대 후반 이후 급속히 전개된 냉전체제의 종식, 세계화, 정보화 등은 17세기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 형성된 근대 국민국가체제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그 실효성을 의문시하게 만들었다.

세계화로 이미 형성된 하나의 지구촌에서 각 개인과 국가들의 개별성과 다양성이 서로 충돌하지 않기위해서는, 우리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지구적 공동성을 모색하는 세계시민(世界市民)이 되어야 한다.

1) 국민(國民).인민(人民).신민(臣民)에서 시민(市民)으로….

이런 ‘시민(市民)’은 수동적인 ‘국민(國民)’, 저항적인 ‘민중(民衆)’, 획일적인 대중(大衆)’과 달리 능동적이고 참여적인 정치 ·사회적 특성과 타인을 존중하고 책임감을 갖는 윤리적 특성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

특히 현대사회의 여러 갈등과 충돌은 비윤리성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종교, 다른 문화, 다른 가치관들 사이에 최소한의 원칙을 지키는 지구적 윤리의 정립이 필요하다. 휴머니즘과 상호성이라는 두 원칙에 입각하며, 자기중심적 휴머니즘에서 벗어나 초월성을 경외하며 지구적 책임의식을 갖는 윤리적 휴머니즘을 지향하여야 한다.

세계시민(世界市民)으로서의 정체성과 지구적 윤리를 형성한다는 것은 어느 특정 국가의 이익이나 정체성을 추구하는 논리나 자본주의 혹은 사회주의 등으로 나뉘는 이데올로기의 차원이 아니다.

개별적인 문화 종교 이념을 뛰어 넘어 개인 각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세계시민사회의 일원으로 규정하고 전 구적으로 통용 가능한 의식과 윤리를 가져야 한다.

대한국민도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거쳐 이제 세계화의 한 가운데 서 있다. 또한 자기정체성과 가치관에 있어서도 전통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글로벌 마인드로 나아가고 있다.

이젠 우리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넘어 세계시민 사회의 문화적 도덕적 가치를 제시하는 새로운 지구적 정신에 대한 담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늘날 탈근대사회에서 대두되고 있는 세계시민사회와 세계시민 개념은 고대나 근대의 그것과 다르다. 먼저 세계시민사회는 단순히 국제적인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는 독립된 시민사회 영역들 간의 연대를 지칭한다.

세계시민(世界市民)에 대한 관점도 개인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지구에 공존하는 시민이라는 관념과 연관된다. 즉 세계시민은 한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인식보다 시민 개개인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개념이다.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세계시민사회 건설을 통해 형성되는 영역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세계시민은 자신의 개성과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세계시민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참여적인 특성을 갖는 사람을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국민(國民)은 근대국가 체제의 구성원을 일걷는 말로 이는 시민권을 획득하여 자신이 속하게 된 국가에 대한 권리와 의무로 규정되는 역할수행자를 의미한 이러한 국민은 국가를 구성하는 수동적인 존재로서의 특성을 갖는다.

즉 국민(國民)은 국가의 통치를 받는 수혜자로서의 성격이 강하며 자기 자신인 능동적인 주체(active subject)’ 로서의 지위를 갖는 시민(市民)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시민(市民)은 또한 흔히 민주주의의 기초가 된다고 여겨지는 ‘민중’ 과도 다른 개념이다. ‘민중’은 피지배자적 성격을 갖는 존재로서 저항과 비판의 행위를 하기는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 정책적 참여를 담당할 수 있을 정도의 주체적인 능력은 부재하다.

수동적인 국민(國民)이나 저항적인 민중이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시민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역량강화(empowerment)가 필요하며,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그들을 시민적 활동에 참여시켜 능동적인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한편 ‘대중’ 이란 개념은 수동적이고 획일적인 대상으로서의 집단을 일컫는다. 즉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고 사회적인 의식이 불투명한 익명의 다수 집단, 생산자들이 물품을 팔기 위해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소비자 집단을 대중’ 이라 부르며, 이 경우 역시 능동적인 사회적 주체로서의 시민으로 보기에는 부족하다.

탈근대사회 시민의 또다른 특징은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거나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탈근대적 시민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개별성과 세계시민의식을 통시에 지녀야 하는데 이 둘의 결합이 종종 정체성의 모호함을 드러낸다.

세계시민은 수동적인 국민(國民), 저항적인 민중(民衆), 획일적인 대중(大衆)과 달리, 능동적이고 참여적인 특성과 윤리적 특성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 현대사회의 여러 갈등과 충돌문제는 다른 종교, 다른 문화, 다른 가치관들 사이에서 최소한의 원칙을 지키는 지구적 윤리의 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늘날 인류는 세계화의 도래로 다양성을 바탕으로 하는 거대한 지구촌이라는 공동체에 살고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 우리의 삶의 범위와 영역을 확장시켜 줌으로써 풍요를 가져다 주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혼란과 갈등도 높여 왔다.

이런 상황에서 지구촌이 질서있는 하나의 공동체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세계시민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양한 배경과 삶의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세계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규범인 지구적 윤리가 정립되어야 한다.

2) 베세토튜브, 아시아튜브 글로벌튜브의 합목적성

동아시아공동체(East Asia Community) 형성과 베세토튜브 프로젝트는 국가와 정부의 리더십으로는 실패가 명약관화한 사안이다. 현재의 국가이기주의와 민족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연목구어(緣木求魚)이고, 백년하청(百年河淸) 더 나아가 천년하청(千年河淸)의 과업이다.

국가와 정부 주도의 동아시아공동체는 그야말로 ‘말의 성찬(盛饌)’이자 언어농단(壟斷)이다.  시민사회와 같은 제3섹터의 추진동력과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실효성이 없다. 개별 프로젝트와 이벤트를 넘어서 지역경제협력은 금융과 인적자원, 그리고 교역대상자들의 신뢰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고 그만큼 금융, 물류, 자원 등에 특화된 인력을 키워내고 그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충분히 씨를 뿌리고 추수를 기다리는 인내가 동아시아 경제협력의 요체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존 한·중·일의 반동적인 수구세력이 아니라 많은 젊은 인력들이 참여하고 성장해야 한다.

지역협력의 요체는 결국 민간 부문의 자발적 참여 네트워크 형성에 달려있다. 생명력을 지닌 지역경제권의 형성을 위해서는 국책사업뿐만 아니라 국제협력 프로젝트와 같은 다층적, 수평적 연계가 긴요하다.

한중일 3국은 ‘조직화된 위선(organized hypocrisy)’이라는 가면을 벗고 베세토동맹, 아중해공동체라는 탈국경적인 시민연대를 통하여 동아시아의 균형과 지역 국가 간의 수평관계를 증진시켜야 한다.

나아가 ‘수평적 지역 네트워크’의 형성과 확대를 통해 전지구적 차원에서 평화와 인류 공동번영을 지향하는 세계시민주의를 지향하여야 한다. 정부가 나서지 못하고 행동을 주저한다면 이제는 제3섹터인 시민사회가 나서야할 시점이 도래하고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공동체 혹은 아중해공동체(亞中海共同體)와 베세토튜브는 북유럽의 한자동맹과 같이 베세토동맹(北首东同盟, ベセト同盟, Beseto League)의 결성을 통해 추진함이 바람직할 것이다.

국가이기주의와 민족주의에서 자유로운 시민사회와 같은 제3섹터에서 담론을 형성하는 한편, 정치·외교·안보 문제 등 국가간 경성 갈등구조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지방정부와 민간 기업이 주도하고 국가와 정부는 후원하거나 적어도 방해하지 않는 거버넌스가 긴요하다.

베이징(北京)시, 서울(首尔)시, 도쿄(东京)도 정부의 삼각 동맹을 주축으로 경과노선에 있는 텐진시, 인천시, 경기도, 강원도, 이시카와, 기후, 나가노, 야마나시현 정부가 참여하는 베세토동맹(北首东同盟) 체제로 출발하여 점차 참여도시를 확대하여 아중해동맹(亞中海同盟)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22세기 생태문명 사회를 살아갈 사해동포(四海同胞, Cosmopolitan)와 함께 상생하고 공영하는 것만이 산업혁명 이후 식민지와 자원약탈형의 서구 근대문명을 초극(超克)하는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s)를 증명하는 제3의 지름길로 진정한 아시아의 시대를 열고 생태문명(生態文明/生态文明, Ecological Civilization)을 꽃피우는 제3의 길이다.

최첨단의 기술력과 함께 막대한 외환보유액 등 자금력도 충분하다. 단지 고질적이고 빈약한 글로벌 리더십이 문제일 뿐이다. 한중일 3국의 동아시아 공동체의 미래는 탈국경적인 시민연대에 있다.

지속가능한 생태문명은 국가의 실패나 시장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제3의 길로 시민들의 자발적 실천과 연대(네트워크)를 통해 자기 의존적이고 환경 정의적 전략들의 실행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Post Author: beseto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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