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懲毖錄)의 교훈과 21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 및 베세토·아중해튜브

  1. 서애 류성룡의 생애
  2. 징비록(懲毖錄)의 주요내용
  3. 징비록이 오늘날에 주는 교훈
  4. 베세토·아중해튜브는 동아시아 평화의 길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서 군국정무의 중책을 짊어지고 외교ㆍ군무ㆍ민정 등에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국난을 극복하게 한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은 우리 역사에 드물게 보존되어온 기록문학으로서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징비록(懲毖錄)’이라는 말은 <시경> 소비편(小毖篇)에 적혀 있는 “내가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난중의 일은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적었는데, 스스로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이 책을 저술한 것으로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영의정, 도체찰사 등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 자리에서 임진왜란을 겪은 류성룡이 지난날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후손에게 남긴 고통의 기록으로 전쟁의 배경, 전투 당시의 상황, 일본과 명나라 등 과의 외교 관계, 주요 맹장에 대한 묘사와 전투 성과, 이후의 백성들의 생활상 등의 임진왜란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이다.

임진왜란에 관련한 기록으로는 국내의 <선조실록>과 <난중일기>를 비롯해 각종 <용사일기>가 있고, 중국과 일본에도 몇 가지 기록이 있으나, <징비록>처럼 임진란을 대국적으로 관찰하고 종합적으로 기술해 뒷세상에 전해준 중요한 문헌은 없다. 또 유성룡은 당시 정국의 최고 책임자로 그의 이야기는 다른 누구의 기록보다도 신빙성이 높다.

류성룡은 전란의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의 중추기관에 참여해 난국을 처리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정국에서 물러나 지난날 성패의 자취를 세밀히 고찰, 반성하여 국가의 큰 계책을 강조했으니, 그의 애국자다운 모습이 이 책에 생생하게 나타난다.

특히 그의 유창한 필치와 탁월한 견식으로 전후 7년 동안의 조선ㆍ중국ㆍ일본 세 나라의 외교관계와 전쟁의 추이를 명쾌하고 간결하게 기술하여, 우리에게는 다시금 지나간 일을 징계하여 뒷일을 조심해야 한다는 결의를 더 한층 환기시킨다.

<징비록>은 중요한 사료인 동시에 전쟁 문학의 가치도 지니고 있어, <난중일기>와 더불어 임진왜란 관련 문적으로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 받는다.

 

  1. 서애(西厓) 류성룡의 생애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본관은 풍산인 류성룡은 1542년 경상도 의성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6세에 <대학大學>을, 8세에 <맹자孟子>를 배웠고, 21세에 안동의 도산에 가서 이황 선생을 찾아뵙고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564년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된 그는 28세인 1569년 성절사(聖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임금에게 수찬(修撰)의 벼슬을 받아 사가독서를 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풍원부원군에 봉해졌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분군법을 예전의 진관제도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일본의 움직임을 예측하여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 목사로, 정읍 현감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추천, 임명해 왜란에 대비하도록 했다.

1592년 수많은 일본군이 침입해 부산진과 동래성이 잇달아 함락되고 도성이 위태로워지자, 몇몇 신하들은 “사태가 위급할 경우에는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유성룡은 이를 강력히 제지하고 왕에게 “ 임금께서 우리 땅을 단 한 걸음이라도 떠나신다면 조선 땅은 우리 소유가 안 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개성에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일부의 모함으로 이내 파면되고, 다시 부원군으로 서용되어 안주에서 명나라 장수의 접대와 군량 보급에 힘썼다. 이후 전란이 끝날 때까지 영의정으로서 삼남도체찰사, 사도도체찰사를 겸무하면서 군국의 정무를 한 몸에 지고, 외교ㆍ군무ㆍ민정 등에 종횡무진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라를 지켰다.

1598년 관직에서 물러나 풍산현 하회동으로 돌아온 유성룡은 전란 중에 겪은 성패의 자취를 곰곰이 반성하고 고찰하여, 뒷날의 일을 대비할 수 있도록 <징비록>을 집필했다. 국보 132호로 지정된 이 기록은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난중일기>와 함께 높이 평가받고 있다.

1604년 다시 풍원부원군에 복직되었으나 이를 사양했고, 그해 7월에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수록되어 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1607년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난 그에게 조정에서는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영남 지방의 선비들은 병산서원(屛山書院)에 향사했다.

 

  1. 징비록의 주요내용

징비록의 저술 동기에 대하여 서문에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란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거기에 임진란 전의 일도 간혹 기록한 것은 임진란의 발단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아! 임진란의 전화(戰禍)는 참혹하였다. 수십일 동안에 삼도(三都)를 지키지 못하고 팔도(八道)가 산산이 깨어졌으며, 임금께서 피란(避亂)하셨으니 그리고서도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천운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내 지난 일을 징계(懲)하여 뒷 근심이 있을까 삼가(毖)노라.’ 고 했으니 이것이 징비록(懲毖錄)을 쓰는 연유라 하겠다. “

1) 징비록 톺아보기

징비록에는 초본 징비록(草本 懲毖錄)과 간행본으로 징비록 16권본(懲毖錄 十六卷本) 및 징비록2권본(懲毖錄 二卷本)이 있어서, 모두 3종류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초본 징비록이 가장 원천이지만, 간행본인 징비록 16권본에는 초본 징비록에 실려 있는 것 외에도 근폭집(芹曝集) 2권과 진사록(辰巳錄) 9권 및 군문등록(軍門謄錄) 2권이 포함시켰으며 징비록 2권본은 초본 징비록에서 맨 끝의 잡록(雜錄)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저서를 통해 임진왜란 전의 일본과의 교린(交隣) 사정을 비롯하여, 전란(戰亂)에 임한 국민적 항쟁과 명나라의 구원 및 바다의 제패에 대한 당시의 전황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 임진란에 대한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가장 대표적인 기본 역사자료가 된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분명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정유재란까지 하여 벌써 400년 이상 지났지만, 아직까지 임진왜란이 겪은 상처는 한국의 전 지역에 남겨져 있다.

부산 기장에 가면 왜성이 있고, 그밖에 많은 곳에 왜성이 외로운 담벼락이 되어 남아있다. 임진왜란이 급박한 상황에서 벌여진 전쟁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하면 떠오른 사람이 성웅 이순신일 것이다. 그는 조선 북경지역 오랑캐를 무찌르던 육군 장수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수군에 능한 장군이기도 했다.

<징비록>을 저술한 서애 유성룡하고 어린 시절 친구이기도 한 그는, 임진왜란 이야기에서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순신 중심으로 흘러간다면, 이에 반해 국내 정치상황과 외교, 경제 상황은 아마 서애 유성룡 중심으로 보는 게 더 적정할 것이다. 서애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학파를 이어받은 동인계 정치인이다.

당시 정치계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동인은 후에 북인과 남인, 북인은 소북과 대북으로 나누어진다. 정치적인 흐름에서 훈구학파가 초기 조선의 권력을 차지한 시점에서 사림학파가 조정에 나오고, 훈구에게 억압당한 사림의 유림들이 이제는 서로 아전투구하는 상황이 발발했다.

전쟁이 나면 무릇 어떻게 하면 적을 제대로 쳐서 멀리 바다 밖으로 내쫓는 것에 대해 궁리하는 게 옳지만, 인간의 이성과 판단력은 그런 대의 앞에서 개인적인 감정과 사익에 따른다는 점에서 역사는 항상 다른 인물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에서 반복되는 형상을 보여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징비록>을 보면 가장 첫 단추가 잘못된 것은 일본 해적들이 국내 백성들과 결탁하여 노략질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왜국과 사신왕래를 하면서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점이다.

선조시대에 매우 훌륭한 신하들이 많았으나, 이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임금의 어리석음, 그리고 전쟁이 나서 종묘사직뿐만 아니라 백성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 전쟁이 끝난 후에 개인적 이익에 신하를 질투하는 한심함은 단지 조선왕조실록에서 선조만이 아닐 것이다.

이후 등장할 인조나 정조 승하 이후 순조 역시 그러하다. 대한제국이 봉건시대의 국가 즉 왕과 귀족계급에 해당되는 사대부가 있다면,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라도 역시 임진왜란 시기에 경험한  일본과의 전례는 존재한다.

<징비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당시 그런 치욕적이고 비극적이며 고통스러운 순간을 기억하며 후세가 무엇을 보고 배워야 하는 점이다.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을 저술하면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악몽, 그리고 그 시기에 있었던 큰 사건을 기록하면서 단순히 기록의 위한 서적이 아니라 후세에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적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볼 것 인가?

<정비록>은 생각보다 개인적 감정이 매우 배제된 상태에서 저술한 도서다. 서애 유성룡이 전쟁 시기에 적은 게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에 정리한 내용이다. 그러나 개인적 감정이 배제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적힌 글을 보면 참 가슴이 먹먹해진다.

피난길에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어느 자리에 앉아 홀로 우는 류성룡, 그 모습을 보는 군관과 지역주민 역시 따라 운다. 백성들이 배고픔과 질병에 힘겨워 괴로워하며 죽어갈 때 또 다시 류성룡은 눈물을 흘린다.

아마 국가정치를 행하는 사람이라면 국가의 녹을 먹는 자라면 류성룡의 눈물만큼 값진 것이 없다고 보겠다. 조선시대에 사대부들은 체통과 체면이란 이름으로 눈물조차 제대로 흘리지 못한 부류다.

예기치 못한 전쟁, 계속되는 패전과 후퇴, 죽어가는 백성들, 부자와 부부가 서로 죽여 잡아먹는 행위에서 전쟁은 인륜을 파괴할 만큼 잔혹하고 끔찍했다. 전쟁이 발생하면 가장 고생하는 것은 정보를 얻을 수 없고, 예비식량이나 무기가 없는 백성이다.

백성을 버리고 가는 국가지도자만큼 못난 인물이 없다. 임진왜란에서 선조의 어리석음과 질투에 대해 논하기란 한숨만 나올 정도지만, <징비록>에선 선조에 대한 원망과 오류를 적지 않았다. 그래도 주변 신하들에 대해 적은 글이 있었다.

일본에 간 김성일이 본 왜정 상황이 적절치 못한 것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이일이란 장군이 용맹만 믿고 지략이 부족해 왜적에게 패배한 일들도 기술한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수들의 판단력과 용기다. 하지만 임진왜란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우리에게 바로 지략과 상황판단이다.

척후병을 제대로 두지 않고, 소문으로 왜적이 온다고 하여 그 소문을 낸 사람들을 참하는 문무대신을 보면서 한심했다. 아마 이순신 장군이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 원인은 바로 그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는 점이다.

이순신의 죽음에 많은 백성들이 통곡했고, 중국에서 파견된 진린 장군도 눈물을 흘렸다. 친구로서 장군으로 천거한 서애 유성룡 역시 그러지 그러하겠지만 이순신은 지략과 담력이 뛰어난 장수이기도 하나, 밑에 있는 수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는 인품과 그릇이 있었다.

가장 최측근의 장수부터 밑에 있는 장졸까지 전쟁에 대한 정보와 상황판단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신의 막사 안으로 들여보냈다. 우린 임진왜란에 이순신에 대한 업적을 아직까지 기리며, 현재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이 존재하고, 매년마다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이순신에 대한 영웅심을 대해 찬양하여 영화 <명량>,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흥행하더라도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조건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징비록>에서 유성룡 역시 친구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반영했다.

우선 그가 갑옷을 진중에서 벗지 않는 점, 쓸데없이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은 점, 주변 지형지세 그리고 수군에서 해류와 바람의 형태를 잘 보고 있다는 점이다. 원균 장군은 왜적을 공격한다고 하는 오만에 수군을 출동했으나, 먼 곳에서 노를 젓고 온 병사들이 체력이 떨어져 결국 왜국의 책략 앞에 무너졌다.

전쟁의 승패에서 전술과 전략은 장수나 참모들이 세우나, 정작 적을 치는 당사자는 군졸이었다. 군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자신의 계급에 도취된 고위직의 한심함이 결국 대사를 그르치게 만든 점이다.

<징비록>이 400년 이상에 벌어진 일이고, 지금 당장 그런 구시대의 무기로 싸우지 않고, 군사편제 역시 그렇지 않다. 게다가 일본과 한국은 국가적으로 외교를 맺고, 민간적 차원에서 왕래가 매우 활발한 이웃국가다. 심각한 극우성향의 아베 정권이 들어왔다고 하여 당장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을 일본을 하든지 혹은 그 외의 국가를 한다고 해도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역시 정보력과 지도층의 능력이었다. 사실 일본은 임진왜란 이전 풍신수길이 이미 열도를 통일한 상태이고, 겉으로 완성된 것이었으나, 전쟁 이후의 군사들은 매우 사나운 점을 조선이 간파하지 못했다.

왜구가 끊임없이 해안을 침범해도 이에 대한 대책을 제대로 수립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간첩들이 왜적에게 정보를 건넬 정도로 국내 내정은 엉망이었다. 선조시대 많은 문신들이 있으나 역시 내정에 문제가 있었다. 임금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쌀이란 말이 있다.

한양과 경기를 제외한 타 지역에 있는 백성들은 가난과 외적들의 침입에 두려워했고, 그들이 국가를 배신하여 적에게 붙는 이유를 생각하면 역시 그렇다. 전쟁이 나더라도 백성들이 안정하지 못한 이유 역시 성을 지키는 수장들이 모두 도망쳐서 그렇다.

성에 사람들이 없다면 여러 모로 불편하고, 산 속에 숨어 있으면 식량부족과 질병에 고통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징비록>을 보면서 가장 화가 나는 점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판단력 부족이란 점이다. 그래서일까?

류성룡과 이순신의 활약이 그만큼 두드러진 이유 역시 주변 상황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임금 중심에서 별로 활약하지 않은 인물보단 격전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의병장과 무신사대부들의 공로가 제일 큰데, 등급은 2번째 내지 3번째다.

관료정치의 한계성, 관료들의 그늘 아래 목숨을 걸고 싸운 수많은 장병들과 의병에게 감사한 마음이야 느끼지만, 한편으로 이 모습 역시 현실적인 것 같았다. 군대에서 내가 복무할 때 생각한 점은 지휘관의 지휘란 전장에서 병사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사람의 생명은 단 하나이고, 그 생명을 잃을 경우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전쟁에서 지휘를 맡은 장수가 중요한 것은 바로 수많은 생명을 담보하고 있기에 그렇다. 장병이 전장에서 무너지면 성과 도시가 침범 당하고 수많은 양민들이 도륙을 당한다.

아직까지 교토의 코 무덤은 일본 왜적이 조선 양민들을 도륙하고 코와 귀를 베어 본국에 보낸 것을 모아진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국가는 바로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위정자들의 그 근본을 잊고,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다면 비극은 다시 국민에게 전가된다.

<징비록>에서 유학을 신봉한 조선은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다. 공자의 가르침이란 바로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나, 그 근본을 망각했다. 그러면서 피난길에 비가 억수같이 내리자, 한국의 조상신인 단군왕검, 기자, 동명성왕에게 제를 올리는 모습에 과연 그 조상신들은 이런 생각으로 국가를 세우고 했을까?

서애 류성룡은 동인이나, 추후에 남인으로 이어지며, 남인에서 대표적인 실학자인 성호사설을 만든 이익에 남긴 <서징비록후>에서 “현인을 추천, 등용시켜 상상을 받는 것은 옛날의 도리다. 세상 사람들은 임진전란에 유성룡 선생이 자신의 힘을 다 쓴 공로가 있음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이 일을 류 선생의 경우에는 사소한 이리이고, 그 보다는 더 큰 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 당시 조선이 망하지 않은 것은 충무공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충무공은 한 사람의 부장에 불과했으니, 류성룡이 아니었다면 다만 군졸들 중에서 목숨만 버리고 말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회복시켜 백성을 편안하게 한 공로는 과연 누구 때문에 이루어진 것인가.

임진왜란을 기억하려는 노력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그 중심에는 물론 이순신(李舜臣)이 있었다. 1793년 7월 21일, 정조(正祖)는 이순신을 영의정으로 추증(追贈)했다. 정조는 1년 뒤인 1794년에는 직접 이순신을 기리는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1795년에는 실학자로 유명한 유득공을 감독으로 명하여 이순신의 유고(遺稿) 전집인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간행하게 했다.

2) 조선 조정이 명(明)나라에 매달린 이유

선조는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고, 의주까지 도망한 것으로도 모자라 백성을 버리고 명나라로 망명할 것을 진지하게 검토했었다. 그러는 동안 백성들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왕조는 정권의 정당성을 명나라에서 찾으면서, 필사적으로 ‘명나라’에 매달렸다. 명나라 군대는 임진왜란, 특히 육전(陸戰)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도 명군(明軍)의 참전은 일본군이 전쟁의지를 꺾고 수세적(守勢的)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됐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의 활약을 중시하는 경향이 조선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류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임진왜란에 대해 독자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즉, 명나라 군대와 조선의 민관(民官) 양측의 활약이 전쟁 승리의 양대 요인이며, 그 중 더욱 중요한 원인은 이순신으로 상징되는 조선의 민관이라는 것이다.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명나라의 도움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순신과 의병(義兵)·승병(僧兵)의 활약을 중심으로 임진왜란을 기억하고 있다. 반면에 명나라 군대는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했거나, 오히려 조선군의 작전수행에 방해가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3) 징비록의 판본  
<징비록>은 임진왜란 7년의 경과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한 책으로 1598년 정계에서 은퇴 후 낙향한 류성룡은 1604년에 이 책을 완성했다. 류성룡 친필의 ‘초본(草本) <징비록>’은 현재 국보 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후 이 ‘초본 <징비록>’의 내용을 대폭 수정하고, 여기에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이 작성한 각종 공문서를 묶은 총 16권짜리 <징비록>이 1647년경에 간행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류성룡을 영의정 겸 도체찰사(都體察使), 즉 전시재상(戰時宰相)으로 임진왜란을 이끈 위인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징비록>에 대한 평가도 높다. 하지만 서인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 1607년 5월 1일 자에 실린 류성룡에 졸기(卒記)를 보면, 당대에는 류성룡이나 <징비록>에 대한 평가가 그리 높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은 조선사회에서 임진왜란을 이해하는 표준적인 틀이 된다. 이순신이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부각된 것도 이순신의 유력한 후원자였던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그의 활약을 강조한 영향이 크다.

류성룡은 국왕 선조를 비롯한 여타 조선 지배층과는 달리 명나라 군대만이 임진왜란의 유일한 승리 요인이라고 간주하지는 않았다.

<징비록>을 읽으면, 조선군 패배 기사 뒤에 명나라 군대의 승리 기사가 놓여 있고, 그 뒤에 명나라 군대의 패배와 이순신 수군의 승리 기사가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류성룡은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백의종군(白衣從軍), 명량해전의 승리와 노량해전에서 전사(戰死)가 <징비록>의 클라이맥스를 이룰 수 있도록 팩트를 드라마틱하게 배치한 것이다.

이는 어지간히 역량 있는 작가가 아니라면 <징비록>의 임진왜란관(觀)과 스토리라인을 능가할 수 있는 임진왜란 대하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4) 일본으로 유출된 <징비록>

‘2권본 <징비록>’은 17세기 후반에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징비록>이 일본에 유출되었음을 알려주는 첫 흔적은 1683년에 제작된 쓰시마 번주(藩主) 도서관 소장 서적 목록인 <덴나 삼년 목록(天和三年目錄)>이다.

여기에는 <징비록>과 <서애선생문집>을 비롯해서,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에서 성립된 문헌 상당수가 보인다. 조선 전기 문헌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약탈되었다면, 17세기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합작해서 조선 문헌을 대량으로 일본에 유출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쓰시마와 가까운 규슈 후쿠오카 번의 저명한 학자 가이바라 엣켄(貝原益軒·1630~1714)이 후쿠오카 번을 지배한 구로다 집안의 사적을 정리한 <구로다 가보(黑田家譜)>를 편찬할 때 <징비록>을 이용한다.

엣켄은 이 ‘2권본 <징비록>’을 일본의 문화 중심인 교토(京都)의 출판업자 야마토야 이베에(大和屋伊兵衛)에게 소개한다. 그리하여 1695년에 일본판 <징비록>인 <조선징비록>이 교토에서 출판된다.
  
<조선징비록>은 ‘2권본 <징비록>’을 4권본으로 바꾸고, 엣켄의 서문과 조선의 행정구역표, 조선지도를 붙였으며, 한문에 일본어식 읽기 부호(훈점)를 붙여서 일본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편집했다. 엣켄은 서문에서 이 문헌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극찬한다.
  
“이 책은 기사가 간결하고 말이 질박하니 과장이 많고 화려함을 다투는 세상의 다른 책들과는 다르다. 조선 정벌을 말하는 자는 이 책을 근거로 삼는 것이 좋다. 그 밖에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와 같은 책은 비록 한자가 아닌 일본 글자(히라가나)로 쓰였지만 이 역시 방증(傍證)으로 삼기에 족하다. 오로지 이 두 책만이 실록(實錄)이라 할 만하다.”
  
<조선징비록>이 출간된 이후, <징비록>에 나타난 임진왜란 인식은 일본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조선징비록>이 간행된 10년 뒤에 출판된 <조선군기대전(朝鮮軍記大全)>에는, 류성룡이 이순신을 천거했다는 <징비록>의 기사를 인용하면서 ‘류성룡이 영웅을 천거하다’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이순신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이순신을 천거한 자신의 공을 강조하고자 한 류성룡의 ‘<징비록>사관’이 일본 사회에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5) 에도시대 일본의 출판문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일본에서는, 포르투갈·에스파냐 가톨릭 세력이 전래한 인쇄기술과 조선 인쇄기술의 영향으로 대량 상업출판이 시작되었다. 근세 일본의 지적(知的) 르네상스기에, 출판인들은 일본의 옛 문헌과 중국·조선·네덜란드 등 외국 문헌을 가리지 않고 책을 찍어 상품으로 판매했다. 책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 데 열중한 일본 독자들 역시 외국 문헌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당시 일본에서 많이 읽힌 대표적인 조선 서적으로는 <징비록> <동국통감(東國通鑑)> <동의보감(東醫寶鑑)>, 그리고 이황(李滉)의 저술 등을 꼽을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역사학이나 의학 등 해당 분야의 일본인들이 읽는 데 그쳤지만, 유독 <징비록>은 일본 대중이 널리 읽었다.

[굶어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빠는 아기를 보고 류성룡이 슬퍼하다. <에혼 다이코기> 중]

<징비록>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전근대(前近代) 일본이 경험한 가장 큰 국제전쟁인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 사회의 지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과 <징비록>을 통해, 왜국(倭國)이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663년에 나당(羅唐) 연합군과 충돌한 백촌강 전투 이래 거의 1000년 만에 중국 군대와 맞붙은 일본군이 어떻게 싸웠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조선과 명나라의 어떤 용맹한 장군들이 일본군에 맞서 싸웠는지 알고자 했다. 상대편이 유능한 장수일수록, 그들과 싸워 이긴 일본 장군들이 더욱 빛나는 법. 이러한 일본 측의 수요를 충족시켜 준 것이 <징비록>을 통해 영웅화된 이순신이었다.  

이처럼 이순신을 영웅시하는 한일 양국의 계산은 서로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한일 양국이 공히 합의할 수 있는 영웅이 되었다.

 

  1. 징비록이 오늘에 주는 교훈

 

징비록은 ‘환란을 교훈 삼아 후일 닥쳐올지 모를 우환을 경계토록 한다’는 뜻이다. 징비는 중국 고전 ‘시경’에 나오는 문장인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에서 따온 단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몸소 경험한 유성룡은 사직한 후 낙향하여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했다. 징비록은 책이지만 국보(제132호)로 지정되어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징비(懲毖)’는 ‘징전비후(懲前毖後)’, 즉 “지난 잘못을 거울삼아 후일을 대비한다”는 의미로  우리가 겪은 임진난(壬辰亂)을 기록함으로써 훗날 다시 올지 모르는 우환을 경계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1) 신숙주에 대한 평가를 되새겨야…

류성룡은 <징비록>의 본문을 시작하면서 먼저 신숙주의 일화를 기술하고 있다. 성종이 죽음을 앞둔 신숙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소?”라고 묻자 신숙주는 “원컨대 일본과의 화평을 잃지 마시옵소서”라는 말을 남겼고 이 말을 들은 성종이 일본에 화친을 위한 사신을 파견했다는 대목이다.

류성룡은 일본의 침략을 겪은 후 신숙주의 <해동제국기>를 떠올리면서 <징비록>을 남긴 것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조선이 제일 잘못한 게 일본 정황을 잘 알지 못했다는 것임을 반성했다. 그래서 서문에 “신숙주의 유언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100년간 일본이 변하는 걸 우리가 몰랐고, 그래서 화(禍)를 당했다”고 썼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을 ‘피로인(披擄人)’이라 불렀는데, 10만 여명의 피로인 중 상당수는 노예로 유럽 등지로 팔려갔고, 30여 년간 돌아온 자는 고작 6000여 명에 불과했다.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첫째, 일본이 일으킬지도 모를 전란에 대한 경계심과, 둘째 대비책으로 무력 사용보다는 평소 그들을 어루만져 달래는 외교, 셋째 나라 안의 정치를 충실히 하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 하는 국론통일과 국력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징비록>에서 류성룡은 특히 세 가지를 명심하라고 했다. 첫째, 한 사람의 정세 오판으로 천하의 큰일을 그르침을 경계하는 것, 둘째 지도자가 군사를 다룰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준 것과 같다는 것, 셋째 유사시 믿을 만한 후원국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와 류성룡의 <징비록>이 말하는 요지는 ‘자강(自彊)과 유비무환’이다. ‘환란이 닥치기 전에 스스로 힘을 길러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체이다. 신숙주의 외교 유화책과 국론통일 지적에도 불구하고 120년 후에는 결국 임진왜란을 맞게 되고, 류성룡은 다시는 이런 환란을 겪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징비록>을 남겼지만 훗날 조선은 일본의 강제병합을 막지 못했다.    

<징비록의 교훈> 이는 ‘평화로울 때 국방을 소홀히 하고 적 앞에서 국론이 분열되는 것은 망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교훈을 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400여 년 전 류성룡 선생이 후손들에게 남긴 징비록의 교훈을 실천하지 못했다. 그래서 멀리는 병자호란, 가깝게는 구한말의 국권상실과 6ㆍ25전쟁의 참화를 겪었다.

장수는 싸우지도 않은 채 도망가기 일쑤고, 그나마 싸워서 이기더라도 모함으로 참형을 당했다. 임금은 백성을 속이고 도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강을 건너오지 못한 백성들이 부지기수인데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배를 불살랐다. 일본에게는 능욕을 당했고 명나라에게는 조롱을 당했다.

한반도는 독특하게 주변 4국 모두가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강대국들로서 경제력 기준 세계 1, 2, 3위 국가들(미, 중, 일), 군사력 기준 세계 1, 2, 3위 국가들(미, 러, 중)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형국 때문에 한반도와 주변 국가들 간에 벌어지고 있는 국제정치 상황은 전 세계 다른 어느 지역에서보다도 갈등 양상이 심화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한반도 위치라는 지정학적(地政學的) 요인 때문이다.

4국 중 미국, 일본은 해양세력이고 중국, 러시아는 대륙세력으로 국제정치의 역사를 살펴보면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은 끊임없이 경쟁해왔다. 과거 역사에서 보듯이 19세기 내내 해양세력 영국과 대륙세력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전략적 경쟁이자 냉전을 총칭하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Турниры теней)이 전개되었고 지금도 한반도는 그 후유증으로 분단이라는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2) 일본의 정세를 도끼눈으로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조정을 향해 “명을 치러 갈 테니 길을 비켜 달라(征明假道)”고 요구했는데 이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며 이러한 딜레마는 300여 년 후에도 반복되어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도 해양세력 일본과 대륙세력 청나라와 러시아가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치른 전쟁이었다.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던 당시에도 또 다시 지정학적 딜레마가 반복되어 그 해 8월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 내고 무장해제시키는 방식에 대해 해양세력 미국과 대륙세력 소련이 타협의 산물로 38선을 만들어낸 결과 한국전쟁의 참화와 지속된 분단 상태를 72년이 지난 지금도 극복하지 못하고 첨예한 남북 간 군사적 긴장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안타까운 상황이다.

해방정국의 격동기 “미국 놈을 믿지 말고 소련 놈에 속지 마라. 일본 놈이 일어선다. 조선사람 조심해라.” 는 내용의 노래가 민초들 사이에 유행했다. ‘울 밑에선 봉선화야’라는 곡에 맞춰 해방 전후에 민중들이 불렀던 노래이다.

국가 지도자의 오판과 외세의존으로 처참하게 당했던 역사적 경험이 빚어낸 무지랭이 백성들의 지혜이자 현대사의 대표적인 경계가(警戒歌)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금도 가슴 찡한 교훈은 강대국들 앞에 민족의 운명을 내놓은 위태로운 현실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극우정권은 또다시 ‘군사대국화’를 향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남북한 간의 긴장이 높을수록 일본 극우세력은 쾌재를 부르며 남북한 긴장은 일본이 군사대국화를 정당화하고 본격화할 빌미가 된다.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이해와도 일치한다.  

3)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지 않으려면…

역사는 반복되는가?(History repeats itself?) 헤겔은 역사의 철학에 관한 강연《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에서 “역사와 경험이 가르쳐주는 것은, 민족과 정부가 역사를 통해서 무엇을 배우거나, 원칙을 이끌어내고 그에 따라 행동했던 적이 없다”고 했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이라는 점에서 헤겔은 옳았으며 역사는 되풀이되는데 이를 항상 예측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국가가 과거로부터 무언가 배우는 일은 흔치 않고 게다가 그 배움으로 올바른 결론을 얻는 일은 더욱 흔치 않을 것이다.

4) 그래도 협력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한·일, 중·일 관계는 역사인식과 숙적관계로 많은 갈등이 있으나 이러한 갈등 상황은 오히려 동북아 평화협력구상과 같은 역내 신뢰구축을 위한 3국간 노력의 필요성을 반증한다. 동북아 지역은 다른 그 어떤 지역보다도 상호의존이 빠르게 심화되고 있다.

경성 및 연성 안보 분야에서 협력 수요가 많으며, 연성안보 의제는 실제 협력의 효과가 커서 역내국가들의 참여를 보다 쉽게 유도할 수 있다. 연성안보 이슈에서의 협력은 궁극적으로 갈등을 완화하고 경성안보 이슈의 핵심 관건인 상호 신뢰 회복에도 기여할 것이다.

유럽연합의 진행 과정을 보더라도 로마제국 이후 이천년 동안 민족, 지역, 국가간 끝없는 전쟁과 1,2차 세계대전에도 불구하고 석탄과 철강 등 경제문제에서 출발했지만 점차적으로 이슈를 확대하여 가장 민감한 사안인 군비 축소에 대한 논의에까지 이르렀고 이는 정치적 긴장과 군사적 갈등을 해소하고 공존의 길을 모색하였다.

역내 국가들이 공동으로 노력한 결과로 유럽의 냉전종식과 평화구축에 기여한 헬싱키 프로세스 역시 적대감과 불신이 팽배했던 냉전기에 출범하여 유럽연합(EU)을 결성한 점은 동북아에도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1. 베세토·아중해튜브는 동아시아 평화의 길

 

국가이기주의에 연원한 동아시아 각국의 편협한 자민족 중심의 역사해석이나 역사공정, 신화와 역사는 엄연히 구분하여야 함에도 신화를 역사로 편입하고 편찬하는 ‘만들어지는 민족주의’는 21세기 글로벌 시대의 모순이다.

지구촌을 하나로 묶는 세계화 바람 속에서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국력이 부상하는 나라에는 자만심을 불어넣고 국력이 하락하는 나라는 불안과 초조감에 사로잡히게 하며 국가를 등에 업은 전통적 민족주의, 자원 민족주의, 사이버 민족주의, 기존 국가로부터 분리와 독립을 추진하는 하부 민족주의 등 다양한 형태로 분출되고 있다.

동아시아 지역 내 각국의 정치·경제·문화적 이질감과 역사적 반목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다자안보대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단계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며 동북아평화협력 구상은 민감한 이슈에 대한 논의는 가능한 한 후 순위로 미루고 공통 관심분야의 협력에 대한 공감대를 자연스럽게 형성하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지역내 대화와 협력의 틀을 정착시키기 위해 상호신뢰의 기반을 마련하여 동북아 평화협력 틀에 적합한 분야를 발굴하고 상호 보완관계를 통하여 한·일·중 3국 간의 협력이 3국 간 평화와 안정, 나아가 아시아 전체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협력 프로젝트가 요구된다.

현재 한중일 3국의 연간 상호 방문객은 약 2,000만  명(2014년 기준)으로 2020년 3,000만, 지리적 인접성과 경제관계 및 관광객으로 매년 꾸준히 증가 할 전망이며, 600개 이상의 도시가 자매결연을 맺는 등 만약 경제적으로 더 저렴하고 항공편 보다 소요 시간이 대폭 단축 되는 신교통 수단이 등장할 경우 한중일 3국의 방문객은 폭증할 것이다.

편협한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 自民族中心主義)와 자국 이기주의에 기반한 3국간의 정치 외교적인 갈등은 과거 19세기 서세동점의 시기 서방국가 들의 유산으로 역내 국가간 개방과 협력이 필요한 글로벌 시대는 단연코 지양되어야 한다.

세계 경제의 축이 아시아로 회기한 21세기에도 전세계 인구의 12%에 불과한 서구 국가들이 ‘글로벌 거버넌스’를 장악하여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세계무대에서 아시아 국들은 경제력이나 인구 및 문화적 측면에서 향유하여야 할 본연의 몫을 행사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노정되고 있다.

베세토튜브(besetoTube)는 중국, 한국, 일본의 수도인 베이징(北京, Beijing)↔서울(首尔, Seoul) ↔도쿄(东京, Tokyo) 간을 진공자기부상 궤도를 육상과 해상에 건설하여 극초고속 튜브셔틀을 운행함으로써 21세기 동북아 韓·中·日국민의 친선과 우의를 증진하는 국제협력 프로젝트이다.

서울↔베이징(도쿄)간 30분~1시간 주파와 베이징↔도쿄간 1~2시간대 주파를 목표로 100년 대계의 관점에서 22세기 이전인 2099년 완성을 목표로 베이징-서울-도쿄를 육상과 해상을 경유하는 최단 구간(약 2000km)의 진공 튜브 방식으로 건설하고, 평균 시속 1,000~2,000km로 주파하는 극초고속 운송 수단을 목표로 한다.

2008년 월가의 악덕 금융자본가 들의 농간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이래 세계경제는 침체가 지속되고 있으며, 화석연료 의존하는 경제는 환경 오염과 전지구적 엔트로피를 증대시켜 미래세대에 부담을 전가하는 지속 가능하지 않는 성장모델이다.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제5모드의 교통수단인 베세토튜브는 이산화탄소 배출의 25%인 교통부문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하고 경제 전반의 신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으며 한중일 3국의 공동이익과 3국의 국민·인민·신민이 함포고복(含哺鼓腹)하는 동아시아 운명 공동체의 인프라로 21~22세기 생태 패권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다.

Post Author: beseto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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