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이브와 천하일가론 및 천하일가 사해동포의 마실길인 베세토·글로벌튜브

  1. 인류의 위대한 여정
  2. 한·중·일 3국의 민족 기원
  3. 천하일가 사해동포(四海同胞)론
  4. 베세토·글로벌튜브는 ‘천하일가의 마실길’

  1. 인류의 위대한 여정

많은 인류학자 들이 “우리는 모두 아프리카에 살았던 할머니의 후손이다.”라고 한다.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기원해 전세계로 널리 퍼졌다는 이론을 ‘아프리카 이브(African Eve)’ 이론이라고 부른다. 모계로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DNA 계보를 역추적해보면 결국은 하나의 뿌리로 합쳐진다.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는 큰 두 가지 설은 창조설과 진화설이다. 창조설은 제외하더라도 진화설에도 인류 발생에 대한 두 가지 설이 있다. 아프리카 기원설과 대륙 동시 발생설이다. 대륙 동시발생설은 각 인종이 각 대륙에서 기후와 환경에 따라 각자 발생했다는 설로 유럽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이다.

1) 인류의 조상은 아프리카 이브(African Eve)

이에 반해 아프리카 발생설은 인류는 아프리카 에서 진화에서 각 대륙으로 퍼져 나갔다는 주장이다. 처음 두 학설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러나 초기 인류화석의 발견과 유전학의 발달로 아프리카 발생설이 정설화 됐다.

1960년대부터 DNA 분자 정보로부터 인류의 기원을 추적하는 새로운 시도가 시작되었고 분자생물학의 발전으로 이 분야의 연구는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로 1987년에 현생인류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아프리카 이브(African Eve)가 등장하였다.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가 모계를 통해서만 전해진다는 점에 근거하여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인류는 아프리카에 살았던 한 여성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브’라는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이브를 빗대어 붙인 것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여성 조상 이브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유전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모계로 이어지는 미트콘드리아를 추적해본 결과 인류의 공동 조상은 아프리카, 그것도 이디오피아에서 출현했다는 이야기다. 인류학자들은 그 최초의 조상, 그러니까 최초의 어머니인 이브를 찾으려고 하고 있다. 지금까지 인류의 첫 어머니인 이브는 약 250만년 전에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화석 ‘루시(Lucy)’다.

루시는 턱이 튀어나오고 이마는 뒤로 밋밋한 경사를 이루는 등 조상이 인간이 아니라 유인원임을 연상하게 하는 많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침팬지보다 똑바른 자세를 유지한 것으로 추정돼 직립보행을 한 인류 초기 조상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루시가 정말 인류의 조상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증이 부족하다. 인간 몸에는 208개의 뼈가 있지만 루시에게 남은 뼈는 반쪽 골격의 28%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정말 여성인지에 대해서도 확실한 증거는 없다. 몸집이 작아 그렇게 추정할 따름이다.

현생인류의 기원에 대한 가장 유력한 아프리카 이브 가설은 미국의 앨런 윌슨(Allan C. Wilson), 레베카 칸(Rebecca L. Cann), 마크 스톤킹(Mark Stoneking) 박사팀이 1987년 Nature 지를 통해, 세계 각 대륙을 대표하는 147명 여성의 태반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한 결과 이들 모두가 약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한 여성으로부터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며 현생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을 주장하였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에너지를 생산해내는 세포 내 기관으로서 세포 핵에 있는 염색체 DNA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DNA를 갖고 있다. 인간의 미토콘드리아 DNA는 단지 37개의 유전자만을 갖는 단순한 유전체로서 두 가지 측면에서 혈통 분화 연구에 유리하다. 

첫째는 부모의 DNA가 뒤섞이게 되는 염색체 DNA와는 달리 어머니로부터 만 유전되어 온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비교적 빠르고 일정하게 돌연변이를 축적하기 때문에 짧은 기간 동안의 유전적 변화를 관측할 수 있다.

난자가 수정되기 위해 정자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은 정자의 DNA뿐이기 때문에 수정란의 미토콘드리아는 난자의 것이며, 따라서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하면 그의 모계 조상을 추적할 수 있다. 

그리고 미토콘드리아 DNA의 상관성은 가계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떨어지게 되는데, 예를 들면 외할머니로부터의 친척 간보다는 외증조 할머니로부터의 친척 간이 더 많은 돌연변이 기회로 더 낮은 상관성을 보일 것이다.

이처럼 가계를 계속 거슬러 올라간다면 모계에 의한 친척 관계의 반경은 점점 넓어지고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게 될 수 있으므로,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미토콘드리아 DNA는 한 사람의 여성을 조상으로 두게 된다는 것이다. 

앨런 윌슨 연구팀의 분석 결과, 아프리카 출신 여성의 DNA가 가장 크게 달랐으며 나머지 모든 지역은 비슷한 수준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아프리카 여성의 DNA가 가장 돌연변이 변화가 많았으므로 가장 오랜 시간을 거쳐온 곳, 즉 최초 DNA가 시작된 곳이 아프리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사람과 침팬지의 단백질을 비교하여 얻어진 분자시계(molecular clock)에 따라 두 종간의 분리 시점을 5백만 년 전으로 보고,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 사이의 분화정도와 사람과 침팬지 사이의 분화 정도의 비율이 1:25라는 결과가 얻어졌기 때문에 사람의 모계는 5백만 년의 1/25, 즉 약 20만 년의 기간내에 분리되어 나왔다는 결론이다.

이렇게 하여 약 14만 년~28만 년 사이에 아프리카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70억 현생인류의 공통 조상 어머니, 즉 미토콘드리아 이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루시가 인류의 이브라면 아담도 있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인류 최초의 남성 아담은 아프리카 서북부에서 살고 있는 부시먼의 직계 조상이었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 고고인류학자, 탐험가인 스펜서 웰스가 세계 곳곳을 누비며 인류 최초의 남성 아담의 흔적을 추적한 이야기를 엮은 <최초의 남자>가 바로 이런 내용을 다룬 책이다. 저자 웰스는 인류 최초의 여성이 이브라면 남편인 아담의 존재는 왜 발견되지 않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그는 부계로만 전달되는 성염색체인 Y염색체에 주목해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부시먼 족, 호주의 원주민인 애버리지니 족, 아제르바이잔의 아제리 족, 러시아 툰드라의 축치 족까지 지구 곳곳의 다양한 종족을 10년간 탐험하면서 Y염색체 DNA를 얻었다.

그는 이를 통해 아담이 아프리카 서북부를 포함하는 광대한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부시먼의 직계 조상이며 6만년 전 이후로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와 호주로 이동해갔다는 것을 추적해냈다. 그렇다면 루시의 자식도 있을 것이다. 모든 현생인류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320만년 전의 여성 루시와 같은 아기 화석(little Lucy)도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됐다. 

세계 최빈국 이디오피아는 근래 세계를 돌며 ‘루시의 유산’이라는 전시회를 열고 있다. 인류최초의 발생지인 이디오피아 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선전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아프리카를 비롯해 중동, 지중해를 거쳐 유럽에 이르기까지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발굴된 각종 고대 유물들을 통해 강성했던 이디오피아의 화려한 과거를 홍보하는데 여념이 없다. 

2) 인류 생존의 비밀

“생명은 언제나 방법을 찾아낸다.” 기후건조화로 숲이 사라져가자, 숲에서 살던 인류는 살길을 찾아야 했다. 그랬던 인류가 지금은 마치 지구의 주인처럼 행세하게 된 생존의 비밀도 이 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생명체에게는 생명보존과 종족보존의 본능이 있다. 주변 환경이 변할 때 생명보존 본능은 강하게 작용한다. ‘변이’나 ‘진화’라는 방법을 택해 살아남기 위한 적응을 한다. 인류도 현생인류로 살아남을 때까지 많은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현생인류는 성공적으로 살아남아 광범위하게 퍼져 사는 종이 되었다. 추운 극한지방에서 뜨거운 열대지방까지, 습기 많은 우림지역에서 건조한 사막지역까지, 각종 기후대, 각종 지형, 각종 환경에서도 인간은 삶을 잘 꾸려가고 있다.

생존을 위한 동물들의 진화는 치열하다. 기린은 높은 곳의 풀을 먹기 위해 목 길이를 늘리는 쪽으로 진화했다. 치타는 효율적으로 사냥하기 위해 달리기 능력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진화시켰다. 인간의 진화는 생물학적으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치타처럼 민첩하지도, 사자처럼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도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인간은 전 지구에 퍼져 살 정도로 성공적으로 살아남았다. 많은 학자들은 인류의 사회적 진화에 주목하고 있다. 인류는 생존 방편으로 주변 자연물을 잘 이용했다. 물론 다른 동물들도 여기까지는 비슷하다.

침팬지도 다급해지면 주위의 돌이나 나무를 던져서 적을 쫓는다. 다윈의 진화론으로 유명해진 핀치새도 주둥이가 무딘 종은 작은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나무구멍 속의 벌레를 꺼내 먹는다. 

그러나 인류는 어느 순간부터 도구를 ‘개량’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점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돌을 깨트려 깨진 돌의 날카로운 면을 이용했다. 이른바 구석기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다가 돌을 용도에 맞추어 다듬거나 갈아서 도구나 돌 칼을 만들어 썼다. 이 시기에 모든 것이 변했다. 채취 대신 경작, 수렵 대신 목축의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인류에게 자연을 활용하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이 시점이 대략 1만 년 전 쯤이다.

그 무렵 빙하기가 끝나면서 동시에 간빙기의 새로운 환경 아래 신석기시대가 시작된다. 이렇게 인류는 수렵채취경제로부터 농업경제 사회로 옮겨갔다. 이것을 경제사에서는 신석기혁명이라 부른다. 신석기혁명은 식량채집에서 식량생산 곧 농경시대로의 변화를 뜻한다.

3) 농업혁명이 가져온 선물

식량채집에서 경작과 목축의 농경사회로 전환되는 농업혁명은 처음으로 잉여생산물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잉여생산물은 분배과정에서 계급사회도 탄생시켰지만 그보다는 문명발달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우선 잉여생산물로 인해 기아에서 해방되었으며, 식품의 저장기술이 발달했다.

이때부터 건조, 소금에 의한 염장, 발효 등 식품을 장기간 보관했다 먹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또 잉여생산물의 교환을 통해 상거래와 교역이 발달했다. 드디어 생산, 교환, 분배, 소비로 일컬어지는 경제가 탄생한 것이다.

그 뒤 인류는 자연계의 먹이사슬 추적에서 점차 자유로워졌다. 나아가 경작이 시작되자 그간의 생존 중심의 생활에서 벗어나 문명과 문화의 싹을 튀워 가꾸어 나가기에 이른다. 문화(Culture)는 경작을 뜻하는 라틴어 ‘Cultura’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경작이 가져다 준 풍요가 문화를 탄생시켰다는 의미로 인류는 여의주를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인류가 이루어낸 기술적인 혁신이나 경제체제의 발전은 생물학적인 진화와는 달리 진전 속도가 빨랐다. 생물학적 진화는 수만 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도구의 개량은 단기간에 폭발적인 진전을 보였다.

반면에 생물학적 진화 이외의 것은 후대에 유전되지 않는다. 곧 학습이나 경험에 의해 얻어진 것은 언제라도 잊혀져 사라질 수 있다. 실제로 문명이나 문화 그리고 경제는 여러 번 정점을 달리다가 추락하여 원점에서 재출발하곤 했다.

인류의 역사는 꾸준히 발전한 것이 아니라 ‘전진과 퇴보’를 반복하면서 발전했다. 후기 청동기문명의 붕괴가 그러했고, 중세의 서유럽이 그러했다. 우리는 이렇게 문명이 퇴보한 시기를 ‘암흑기’라 불렀다.

인류문명의 암흑기는 언제라도 닥칠 수 있다. 일례로 지구온난화 현상은 이제 지구촌 어디에서나 실감하는 평범한 일이 되어버렸다. 지구온난화 현상이 인류문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 봄은 미래에 닥쳐올 비슷한 일을 미리 막기 위함이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를 종족과 종족 간 투쟁의 기록이라는 결과론적 접근방법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인류 생존의 본질적인 요소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세계적인 기후 변화, 먹이사슬의 변천, 민족의 대이동, 교역로 확보전쟁, 해양민족과 대륙민족 간의 갈등, 주변부 민족의 세력화 등 기존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거시적 요인들을 다각적이고 역동적으로 다시 조망할 필요가 있다.

4) 생존을 위한 멀고 험난한 여정

그렇다면 이런 혁명적인 도약을 위해 인류는 어떤 진화과정을 거쳐 왔을까? 동물들과 인류의 조상들이 서로 비슷한 환경에서 경쟁하던 시기, 같은 출발선 상에 동물과 인간이 처음 놓여있던 시점을 한 번 상상해보면서 생존을 위한 멀고 험난했던 인류의 여정을 살펴보자.

사실 인간은 달리기 능력 면에서 볼 때 다른 동물에 비해 매우 느린 종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도 강점이 있다. 바로 ‘오래’ 달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처럼 몇 시간씩 계속 걷거나 뛸 수 있는 동물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인간은 목 인대가 머리와 눈을 안정시켜주고 아킬레스건이 달리기 효율을 높여주며 엉덩이가 몸의 밸런스를 맞춰주는 역할을 한다. 더욱이 털이 적다 보니 땀 흘리기가 쉬워 체온의 급격한 상승을 막아준다. 그래서 인간은 비록 느리지만 사냥감을 꾸준히 추격할 수 있어 동물이 지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뒤쫓아 결국 사냥에 성공한다.

인류가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직립보행과 연관이 크다. 몸을 지탱하는데 두 발만으로도 충분하게 됨에 따라 남은 두 발이 손이 되어 도구를 다루게 되었다. 도구 사용과 더불어 팔로 던지기를 할 수 있어 다른 동물과 맞서 싸울 수 있게 되었다. 돌이나 나무를 이용해 상대를 공격할 수 있게 되면서 공격범위가 넓어지고 거리도 길어졌다.

5) 불의 사용으로 두뇌가 발달하다

그 뒤 인류는 불을 피워 사용하기 시작했다. 불은 위험한 동물들의 접근을 막아주었다. 인류는 거주 공간에 불을 피워 다른 동물들의 침입을 막아 방어력을 높였다. 또 불이 추위를 누그러뜨렸다. 인류는 본디 따듯한 지역에서 태어난 종족이라 추운 지역에서 살기 어려웠다. 그러나 불이 추위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어 살 수 있는 지역의 범위를 크게 늘려주었다.

아울러 불이 음식의 조리에 쓰였다. 불은 음식을 연하게 먹기 좋게 만들어 준다. 인간은 불로 조리된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씹어서 분쇄하는 과정과 삼켜서 소화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에너지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이로써 인류는 보다 더 많은 열량을 빠르게 섭취할 수 있어 몸은 커지고, 내장과, 흉곽, 턱 근육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두개골과 뇌 용량이 커지게 되어 두뇌가 발달했다. 인간은 두뇌가 발달하자 만류의 영장이 될 수 있었다. 조리가 없었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6) 전 세계로 뻗어 나간 인류

이런 비약적인 발전을 통해 호모 에렉투스 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우리 인류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가기에 이른다. 기원전 170만 년에는 아프리카를 넘어 섰고, 기원전 150만 년에는 아시아 지역까지 도착했다.

아프리카에서 시작한 호모 에렉투스 계열이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자바원인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베이징에서 북경원인이라는 이름으로 화석이 발견된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 알 수 있다.

전 세계로 뻗어 나간 첫 번째 인류는 호모 에렉투스였다. 또 이들은 초기 구석기 시대를 연 장본인이기도 했다.

각 지역으로 퍼진 이들은 각자 독자적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그 근거가 바로 이들이 사용했던 석기들이 지역마다 다르게 발전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같은 유형의 석기들을 가지고 널리 퍼진 것이라 봤지만 2008년 코카서스 지방에서 발견된 석기가 아프리카 지역의 석기와 다른 유형이란 것이 밝혀지면서 석기가 각 지역마다 독자적으로 발전해 나갔다는 새로운 이론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구석기시대에 호모 에렉투스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들의 영광은 결국 끝까지 지속되지 못했다. 이들을 대체할 보다 더 강력한 존재가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바로 호모 사피엔스로 현생인류의 조상이 그들이다.

7) 아프리카 단일기원설

해부학상 현생인류의 기원에 대한 과학자들의 지배적인 견해는 ‘아프리카 단일기원설’이다. 이는 모든 현대인이 아프리카에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간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이라는 주장이다. 유전학적으로는 현대 인류는 모두가 한 종의 후손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미토콘드리아 DNA로 알아낸 여성 조상은 15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 살던 한 여성이고 Y 염색체로 알아낸 남성 조상은 6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 살던 한 남성이라는 것이 유전학 연구의 결과이다. 이들이 아프리카에서 몰려 나와 태평양과 아시아, 유럽, 그리고 아메리카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그 이전에 살고 있던 이들을 밀어내고 이 땅의 주인이 되어 후손을 남기게 된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다른 종들을 제압하고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패권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다른 종들보다 ‘협동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소통능력’이 강했다. 간단한 의사 표시를 뛰어넘어 자기 생각을 풀어낼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었다.

​ 현생인류의 기원에 대한 과학자들의 가장 지배적인 견해인 이 가설은 인간이 아프리카에서 진화하여 6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벗어나 5만년에서 1만년 사이에 유럽에서 ‘호모 네안데르탈인’을, 아시아에서 ‘호모 에렉투스’를 대체하면서 퍼져나갔다고 한다.

그 이전에 다른 지역에 살던 다른 종들은 후세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호모 사피엔스가 그들을 대체했다는 ‘교체이론’과 일부는 성적접촉에 의해 교배했다는 ‘교배이론’이 있으나 ‘교배이론’에 의하면 현생인류에 남긴 그들의 DNA는 겨우 1~4% 수준으로 극히 미약하다고 한다.

결국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는 약 20만 년 전에 처음 등장했고, 약 7만 5천 년 전에 멸종 위기를 극복했던, 아프리카에 살던 이들의 후손이다. 이러한 ‘아프리카 기원설’이으로 유전학적으로 볼 때 현생인류의 어머니 쪽 조상은 15만 년 전에, 아버지 쪽 조상은 6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 살던 사람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1. 한·중·일 3국의 민족 기원

 

1)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전세계 과학자들이 참여한 유전자 연구는 ‘중국인의 조상은 동아프리카로부터 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일부에서 주장하는 베이징원인과 같은 동아시아의 직립원인과 원시호모사피엔스는 빙하기 동안 열악한 환경에서 멸종하였고, 그것을 대신한 것이 아프리카로부터 옮겨온 현대 인류로 베이징 원인은 현대 중국인의 조상이 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은 한족이 주체가 되는 다민족국가(多民族國家)이다. 인구를 92%를 차지하는 한족을 비롯해 총 56개의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한족 외에도 좡족, 후이족, 몽골족, 다우르족, 에벤크인, 허저족, 만주족, 시버족, 조선족, 먀오족, 위구르족, 티베트인 등이 있다.

한족들은 소수 민족들이 사는 지역에도 많이 거주하며 많은 소수민족 지역에서는 절반 이상 또는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소수 민족에 따라 자신들의 언어를 구사하는 경우도 많지만, 중국어를 쓰는 경우도 많으며, 한족화 때문에 고유언어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다만, 후이족은 의복, 생활, 종교를 제외하고 한족과 구별이 없고 중국어도 사용한다.

한족의 기원은 화하족(華夏族)이며 한나라 이후 한족으로 부르고 있다. 한족은 한나라때와 북주전까지는 지배 민족이였으나 북주때부터 선비족에게 지배를 당했고 양견과 이연은 선비족으로 알려져 있으며 명나라때 다시 국토를 수복했으나 원나라, 청나라 시대에는 다시 피지배 민족이 되었다.

중국에 순수 혈통 ‘한족’은 없다

중국인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漢族)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민족이라고 하지만 과학자들의 최신 연구결과 실제로 순수한 혈통의 한족은 없으며 한족이라는 개념조차도 DNA 검사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 간쑤(甘肅)성 성도 란저우(蘭州)에 있는 란저우대학 생명과학학원 셰샤오둥(謝小東) 교수가 최근 마무리한 중국 서북지역의 소수민족 변천에 관한 DNA 연구등을 통해 내린 과학적 결론이다. 그는 대규모 혈액 샘플 DNA 연구를 통해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 및 이동 경위 등을 파악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다’고 생각돼 왔으나 이는 어느 한 시기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인 획분을 한 것일 뿐”이라면서 “한족을 그렇게 지역적으로 특정해서 정의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중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우리는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연구 결과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가 오래 동안 ‘북적(北狄.북쪽 오랑캐)’ 지역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黃帝)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炎帝)의 발원지는 간쑤성 동부에서 산시(陝西)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지역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부터 중원에 속하지도 않고 한족 거주지역도 아닌 북적 지역이었다.

또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주로 현재의 산시(山西)성 남부와 장쑤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성 서북부 등의 소수 지방을 포함한 허난(河南)성 일대였고,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인이라고 생각돼 왔으나 이것도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셰 교수의 주장이다.

상(商)나라와 주(周)나라 시기를 보면, 현재의 산시성 시안(西安)에 수도를 정한 서주(西周)는 분명히 한족에 속하지만 그 이후 춘추전국시대에 들어 산시성 일대에서 일어선 진(秦)은 소수민족이었던 ‘서융(西戎.서쪽 오랑캐)’이었다는 것이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오히려 객가족(客家族)이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밝혀졌다”면서 “현재는 소수민족이 됐지만 객가족의 고어(古語), 풍속 및 습관에서 나타나는 역사의 흔적을 보면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중원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에 순수한 혈통의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대규모의 민족 이동과 관계가 있다고 밝히고 “장구한 기간에 걸쳐 주변 소수민족 심지어는 주변국가가 한족과 부단히 융합한 결과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전세계의 한족 인구는 약 13억명으로 세계 전체 인구의 19%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다른 말로 ‘중화주의(中华主义)’로 중화주의의 주체를 ‘중화민족’(中华民族)으로 부른다. 중화민족은 ‘중화’와 ‘민족’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중화는 아주 오래전 부터 전해 내려오던 말이지만 민족이란 단어는 18세기 유럽에서 생겨난 단어이자 개념이다.

중국에는 19세기에 일본의 문헌을 통해 전래되었다. 민족이라는 한자어는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졌고 1902년 양계초는 <중국학술사상변천지대세>라는 글에서 처음으로 중화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중화민족이라는 단어는 19세기에 외세의 침략과 도전 앞에 스스로 자각하게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중국에 살던 인류 역시 여러 집단 간에 구분이 있는 부족군이 형성이 되며 그 중에 하나를 ‘화(華)’라고 하였고 또 하나를 ‘이(夷)’라 하였다. 그 중 화(華)는 본래 황하 중하류에 거주하던 부족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이(夷)는 본래 활을 지닌 사람을 가리키던 한자로 회하(淮河)와 양쯔강 남부에 살던 부족을 일컫는 말이었다..

진나라 시기에 이르러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여 중국에 통일된 왕조가 최초로 출현하고 중국의 부족과 사람들에게 하나라는 인식이 처음으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중국 지역이 계속해서 통일되고 확장되는 속에 ‘화’의 개념은 계속 확장되고 한(漢)나라 때 이르러는 한조와 ‘화’는 이미 거의 같은 개념이 된다.

수당을 거치면서 ‘이(夷)’는 변방지역에 있는 유목민족과 한반도 그리고 동남아 지역 일대의 비중원지역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의미가 바뀌며 북적, 남만, 동이, 서융 등의 오랑캐라는 개념도 이 시대에 출현하며 ‘화(華)’ 와 ‘이(夷)’는 더 이상 중원 안의 서로 다른 부족의 관계가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국제사회를 일컫는 말로 확장되었다.

이후 중국에는 송,원,명,청 각각 통일왕조가 차례로 들어서고 통일왕조는 오늘날 현대 중국의 관점을 볼 땐 다 같은 자국의 역사지만 과거 당시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는 다른 정치집단 간의 전쟁 혹은 다른 부족들간의 투쟁의 역사로 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중국이라는 국가적 유대가 없었고 남송 때 악비의 여진족 토벌이 중원사람들의 환영을 받은 것과 명청 교체기 중원에 끊임없이 한족의 민란이 들끓었던 것은 그 당시 중국지역에는 다른 정체성을 지닌 여러 부족 집단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예이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은 서구열강의 도전에 직면하고 아편전쟁(阿片战争)과 청일전쟁 (甲午战争)에서의 잇따른 패전으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되어 중화제국은 급격히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정세 속에 중국 내부에서는 반봉건, 반제국주의 사상이 출현하고 이에 호응하는 무장 봉기들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게 되며 입헌운동과 신해혁명 등이 그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신해혁명은 중화민족이라는 개념 정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청조가 멸망하기전 청나라 정부 내부에서도 서구의 민주개념을 응용하여 중화민족 간의 평등과 융합을 시도한 적이 있었으나 만주족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보수층의 방해에 의해 무산되었다. 

그러나 신해혁명의 발발로 청조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전환된다. 신해혁명으로 세워진 중화민국은 “오족공화”(五族共和)의 기치를 천명한다. 신해혁명이 민족개념형성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중국 내 민족의 형성에 저해가 되던 만주의 주체세력을 무너뜨림으로써 민족융합의 기초를 다졌다.

청조라는 공동의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몽고족과 티베트족 등이 한족 등과 결합하기 시작하면서 초기 통일민족주체를 형성하고 혁명이후 중화민국이라는 정식국호를 사용하고 민족국가라는 것을 끊임없이 주지시킴으로써 각 민족 간 연대감 형성에 기여했다.

민족개념의 형성에 있어 당시 근대 지식인들의 역할이 지대하다, ‘중화민족’이라는 명칭은 당대의 지식인으로 이름 높았던 양계초(梁启超), 양도(扬度) 등의 저서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다. 양도는 자신의 저서에서 “중국 영토는 한(汉), 만주(满), 몽고(蒙), 회(回), 장(藏: 티베트)”족이 거주하는 토지를 칭하며 인민 또한 한, 만, 몽, 회, 장의 다섯 민족을 칭한다”라고 밝혔다. 

오늘날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중화민족의 개념은 근대의 개념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중국은 5개의 민족공동체가 아닌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임을 공식적으로 밝혀 외부환경과 내부환경의 주요변수들로 인해 중화민족의 실체는 확장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근대에는 청조 때의 영토를 기준으로 그 안에 거주하는 한족 및 기타 소수민족까지 포함하는 다섯 민족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정립되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래에는 한족과55개의 소수민족을 포함하는 거대한 민족 개념이 되었다. 물론 민족을 구분하는 법 또한 그 성질이 모호하고 중국정부가 자의적으로 해석 하는 경향이 지적되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영토와 민족구성이 확대되어 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또한 민족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일수록 더욱 강조되고 부각 되었다. 이는 내부인과 외부인 혹은 자기와 적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분열된 시기에 내부 집단의 단결과 안전을 위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민족의 실체는 통일과 그에 파생되어 나타나는 연대감은 형성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고 일단 형성되면 오랜 시간 지속된다. 민족 실체의 통일은 결국 각 민족과 부족들 간의 장시간의 전쟁과 연합의 산물이다. 이러한 과정들의 숱한 반복 속에 각 문화는 개량되고 융합되어 왔다. 

융합과 통일이라는 역사적 기억들은 꾸준히 전승되어 오늘날 중국을 이루는데도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중국역사에서 통일 대업을 이룬 군주들 중에서도 유독 진시황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전국을 통일하여 통일된 하나의 국가라는 역사 기억을 최초로 심어준 군주이기 때문일 것이다.

2) 한민족(韓民族)———-

한민족(韓民族)은 한반도와 그 주변의 만주, 연해주 등지에 살면서 공동 문화권을 형성하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아시아계 민족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화인민공화국·일본에서는 조선민족(朝鮮民族), 구소련 지역에서는 고려인(高麗人) 등으로도 부른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겨레’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조선 시대 이전의 ‘동포'(同胞)라는 개념과 같다. 엄밀하게 국적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국민을 주로 의미하는 한국인(韓國人)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관용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의 유전과학은 우리민족의 시원(始原)이 바이칼 호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뒤 이들이 남하해 요하문명과 알타이어를 탄생시켰다. 이렇듯 유전과학의 발달은 화석에서 DNA를 추출하여 인류의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면서 인류의 기원과 이동경로에 대해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공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북쪽 바이칼호로 이동하다.

태초부터 지구 역사는 빙하기와 온난기를 반복하여 왔다. 지구상에 인류가 탄생한 이후로는 대규모 빙하기는 없었지만 소규모 빙하기는 수 천 년을 주기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빙하기는 인류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빙하기가 오면 초원이 얼어붙고 생물군이 사라져 초원지대는 지금보다 수백 km나 남쪽으로 밀려 내려왔다.

반면에 온난기가 찾아오면 북반구를 뒤덮고 있던 얼음층이 북쪽으로 물러가면서 북쪽에 새로운 초원들이 생기고 생물군이 나타났다. 초원이 북상한 것이다. 이 경우에는 사람들이 초원길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했다.

오늘날의 세계 인류는 크게 세 종족으로 나뉜다. 백인종을 포함하는 코카소이드(Caucasoid)와 황인종을 총칭하는 몽골로이드(Mongoloid) 그리고 흑인종을 총칭하는 니그로이드(Negroid)가 그것이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 이러한 세 종족으로 분리된 것은 호모 사피엔스 단계로 우리 민족은 몽골로이드에 속한다.

간빙기가 끝나고 빙하기가 다시 오면서 몽골리언은 바이칼호 지역에 오랜 기간 갇혀 살았다. 주변이 동토의 빙하가 되어 이동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빙하기에는 바이칼호에 물이 적었고 대부분 초원이었다. 초원의 오아시스 같은 장소로 호수의 수면은 훨씬 낮고 물고기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 뒤 빙하기가 끝나면서 물이 차 지금의 바이칼 호수가 되었다. 바이칼 호수는 여러 가지 세계 기록을 갖고 있다. 2500만년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다. 그 둘레는 2,200km이며,  최대 깊이 1,742m로 세계에서 가장 넓고 가장 깊은 호수다. 

궁둥이에 몽골 반점을 갖고 있는 몽골리언.

궁둥이에 몽골 반점을 갖고 있는 몽골리언의 형성지가 알타이-바이칼 지역으로 몽골리언이 성장하여 성인이 된 곳이다. 한국인 갓난아이의 97.1%에서 몽고반점으로 불리는 ‘몽고점(Mongolian spot)’이 관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일본과 중국에서 몽고점을 갖고 태어난 갓난아기의 비율보다 10% 포인트 이상 높은 수치다.

몽골반점은 갓난아기의 엉덩이나 등, 손 등에 멍든 것처럼 퍼렇게 보이는 얼룩점으로, 보통 7살 이전에 없어진다. 몽골과 만주, 시베리아, 한국, 일본, 중국 양쯔강 이북 지역, 중앙아시아, 인도 북부의 부탄, 티베트, 아메리카 인디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바이칼호에 현재 수면만큼 물이 올라온 게 1만2천 년 전으로 당시 사람들은 거대한 홍수를 만나 바이칼호 지역을 탈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기원전 1만4천경 바이칼호수 연안에서 등장한 동북아시아의 쐐기형 돌도끼는 불과 1∼2천년 사이에 티벳, 몽골, 동북시베리아, 한반도, 일본까지 급속히 확산되었다. 가벼운 나무창으로 기동력을 확보한 집단이 바이칼을 기점으로 동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바이칼호 주변에는 고고학적 유적들이 무수히 널려 있어 구석기 시대로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가 된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3만∼5만 년 전의 고고학적 유적이 전혀 발굴되지 않는다. 반면 더 추워 사람이 살 수 없었을 것 같은 이 지역에는 유적이 많다. 

빙하기가 끝나면서 이동이 시작되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보면 동북아시아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인디언들의 중심그룹이 이동한 것이 1만4천 년 전이다. 시베리아 원주민의 신화와 습속은 우리 샤머니즘의 전통과 흡사하다. 그들의 기층 문화가 우리 민족의 원시 문화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은 그들의 기원과 계통이 우리와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서쪽으로 간 몽골리안 국가들에는 핀란드, 헝가리, 터키를 비롯하여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부탄 등 ‘탄’자가 들어가는 나라가 많이 있다. 그 탄이 우리나라의 ‘땅’과 동의어로 분석된다.

그 뒤 동이족의 중심 지역도 남하하여 홍산문화 지역에 다다르게 되었고 이곳에 사람이 정착한 것이 1만1천 년 전 쯤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꽃핀 홍산 문명은 중국의 황하 문명보다 약 2천 내지 1천년 정도 앞선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들이 조선족과 흉노족으로 나눠진다. 조선족이 건국한 나라가 고조선이다. 조선시대에 오랑캐라고 불리었던 만주 일대의 민족들이 유전학적으로 모두 한 핏줄이다.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조선족과 흉노족은 3000년 전에는 형제 동족이라는 내용이 있다.

몽골리언은 모두 형제 민족

역사적으로 바이칼 호수는 유라시아 유목민족들의 발원지로 그들은 모두 몽골리언의 후손들이다. 기원전 200년부터 한나라를 압박하며 북쪽 초원지대에 큰 나라를 세웠던 흉노족은 물론 중국에 북위(北魏), 북주(北周), 수(隨), 당(唐)을 건설했던 선비족의 고향도 바이칼호 주변이다.

또 4세기 후반 로마를 위협했던 훈족, 6세기 후반 20년 만에 만주에서부터 서쪽 비잔틴제국의 북방지역, 남쪽으로는 힌두쿠시에 이르는 세계 최초로 유라시아 동서남북에 걸친 대제국을 일구었던 투르크(돌궐)족들도 모두 몽공리언이다.

8세기 중반 투르크제국을 무너뜨리고 몽골 고원을 차지한 후 약 100년 동안 지배한 위구르족, 9세기 투르크 계통 몽골족 키르기즈, 10세기 요(遼)나라를 건설하여 북송(北宋)을 압박하며 11세기까지 동방의 실질적 지배자 거란족 역시 몽골리언이다.

12세기 초 바이칼호수 근처에서 일어나 대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스칸의 몽골 등 유목민족도 역사적으로 바이칼호수 주변에 그 근거지를 두고 있다. 그들에게 바이칼 호수는 민족의 발원지이자 성지였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유전자가 거의 같은 사람들로 시대에 따라 스스로를 부르는 호칭이나 중국인들이 이 민족들을 가리킬 때 사용한 한자들의 발음이 달랐을 뿐이다.

수천 년간 인류의 삶과 문명에 가장 역동적인 유목민족들의 거점 핵심지역이 바이칼 호수 지역이다. 곧 바이칼이 모든 몽골인종의 근원지로 육당 최남선은 바이칼 호수 일대를 우리 민족의 발상지로 주목한 바 있다.

몽골리언의 원형질을 잘 계승한 한민족

중국 동북 3성과 윈난성 일대 소수민족, 장족도 몽골리언들이다. 몽골, 중남미의 인디오들, 베트남도 몽골리언들이다. 중국 남부로 내려간 몽골리언은 남방계 민족과 함께 중국 문명을 만드는 주류 세력이 되었다.

유전적으로 보아 우리 민족의 뿌리는 크게 두 갈래다. 약 70%는 북방계, 30%는 남방계로 이 두 계열의 사람들이 완전히 결합하여 하나의 민족으로 거듭난 것으로 보고 있다. 빙하기가 끝나고 요하 부근으로 남하한 몽골리언들이 이 지역에 살고 있던 남방계 사람들과 섞이면서 새로운 문명을 발달시켰다. 

유전자 추적에 의한 인류 이동도를 보면 한국인과 일본인, 몽골인, 티베트인, 터키인은 에스키모인, 아메리카 인디언과 유전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한 묶음이다. 이른바 알타이어족이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 이들은 약 8000년 전에 나누어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 한민족이 유전학적으로 몽골리언의 원형질을 가장 잘 계승, 발전시켰다고 한다. 한국인과 바이칼 호 주변에 사는 부리야트인이 혈연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사실은 모스크바유전학연구소의 자카로브 박사에 의해서도 규명되었다. 

특이한 것은 한반도와 인도 남부인의 유전자 지도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고대로부터 두 곳 간에 사람의 이동이 많았던 것을 뜻한다. 그만큼 양 지역간에 해상 왕래가 잦았던 증거이다. 가야 왕국으로 시집 온 인도 공주 허 황후의 이야기가 신화만은 아닌 것이다.

3) 야마토(大和)민족———

일본인의 기원은 남해에서 온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과 중국의 장강 하류 지역에서 온 이래 조엽수림 문화를 일본에 전래한 민족 등 여러 민족의 이주가 형성되었고 이후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서 살던 민족이 일본 열도에 이주했기 때문에 일본 열도 원주민들과 같이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로 이어진 민족이동의 경로는 지리적 조건에 따라 크게 3가지 경로로 볼 수 있다. 첫째는 한반도 서부지역에서 북규슈 서부로 들어가는 것, 둘째는 남해안을 지나 북규슈 동부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셋째로 동해안을 지나 동해에 면한 이즈모 지역으로 건너간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일본인은 한국인과 흡사하다. 외모로 분간할 수 없다. 일본은 서남에서부터 규슈, 시코쿠, 혼슈, 그리고 홋가이도의 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동의 홋가이도에서만 아이누족이 주로 거주한다. 아니누족은 러시아 대륙으로부터 온 사람들이다. 서남으로는 한국으로부터 북동으로부터는 러시아로 이주됐음을 알 수 있다.

언어학 측면으로 보면, 일본어는 알타이어족 중 고립된 언어로 본다. 같은 알타이어족 중 고립어인 한국어와는 15% 정도 서로 공유하는데, 이것으로 보아 두 언어는 5000년 전에 서로 분기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아니누어와 일본어는 어떠한 특별한 관계도 없다

DNA에 기록된 2300년 전 일본사

DNA 분석 결과 한국인과 일본인은 형제나 다름없다는 것이 최근 연구 결과를 통해 밝혀졌다.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는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결과 본토 일본인의 23%, 한국인의 27%가 같은 DNA 유형을 갖고 있다고 발표했다.

정작 DNA로 한국인과 일본인의 족보를 파헤쳐 보면 두 민족은 형제나 다름없다. 2300년 전쯤부터 수백 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이 사실상 일본을 세웠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이렇게 가까운 혈족이란 것은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우리는 그저 불교를 전파해 주고 도공들이 몇 백 명씩 건너갔다는 정도로 생각하였으나 밝혀진 것처럼 한반도에서 수만 혹은 수십만 명씩 건너간 이민자들이 일본인이 됐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반면 본토 일본인과 중국인은 서로 겹치는 유형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었다. 단순히 과거에 한반도에서 불교를 전파해 주고 도공만이 건너간 것이 아니고, 수백 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이 사실상 일본을 건설한 것이다.

일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동북아대륙의 어느 인종과도 함께 자리 매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었다. 하지만 한국, 일본 등 아시아 4개국 유전학자들이 1996년 유전자를 통해 일본인의 기원을 밝힌 논문을 발표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이 연구는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가 주도하고 한국 학자도 참여했다. 이들은 남한, 중국, 혼슈 지방에 사는 일본 본토인, 오키나와인, 홋카이도의 아이누 족 등 모두 293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했다.

그 결과 본토 일본인의 23%, 한국인의 27%가 같은 유형을 갖고 있었다. 반면 본토 일본인과 중국인은 서로 겹치는 유형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었고 본토 일본인과 아이누 족은 같은 유형을 가진 사람이 6%에 불과했다.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 사토시 호라이 박사는 “한국인과 본토 일본인의 유전적 거리는 거의 영(0)이다”고 논문에 썼다. 즉 2300년 전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과 일본 원주민이 섞이면서 야요이 시대(BC 3세기∼AD 3세기)가 시작됐고 융합이 서기 600년까지 계속되면서 현대 일본인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이주자들은 처음에 일본 규슈 지방에 먼저 정착하고 이어서 일본 열도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로 이주했다.

DNA 뿐만 아니라 문화도 비슷해

일본 돗토리 대학 의학부 이노우에 다카오 교수 팀은 2003년 더욱 확실한 증거를 발표했다. 벼농사 도입과 청동기 전래로 상징되는 야요이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유전자가 현대 한국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이노우에 교수 팀은 야요이 시대 유적인 돗토리 현 절터와 사가 현에서 출토된 야요이인 유골 4점의 미토콘드리아 DNA의 염기서열을 분석했다. 그 결과 한국인과 혼슈의 일본인이 동일한 집단에 속했다. 유골이 발견된 돗토리 현은 동해와 맞닿은 혼슈 지방의 해안 도시이고, 사가현은 규슈 지방 북부에 있다. 두 곳 모두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다.

일본에는 수만 년 전부터 동북아시아에서 들어온 아이누 족, 류큐인 등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수렵이나 채집 생활을 했다. 기원전 4∼5세기경 한반도를 통해 도래인이 건너가 벼농사와 함께 청동기 및 토기 문화를 전파하면서 일본에서는 비로소 농업 혁명이 시작된다. 일본 문명의 원형이 만들어진 야요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100여 개의 부족국가를 세우고 서로 경쟁하다가 마침내 4세기에 야마토(大和)라는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운다. 일본의 야요이 시대와 야마토 시대는 한반도 이주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정치권력이 들어선 야마토 시대는 고분문화 시대(AD 300∼700)라 불릴 정도로 무덤이 많은데 대부분 백제의 고분과 비슷하다.

대륙 혼란이 일본 이주사 만들어

그렇다면 한국인이 일본으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한 2300년 전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대륙은 큰 혼란의 시기였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앞두고 진·초·연·제·한·위·조 7웅이 피의 전쟁을 벌이던 전국 시대(BC 453∼221)였다.

이때 한반도와 만주 지방에는 고조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중국의 역사서에 따르면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경 처음 등장해 기원전 4세기 무렵에는 중국 요녕 지방에서 한반도 서북 지방에 걸친 강력한 국가였다. 그러나 기원전 300년 전 중국 전국 시대 칠웅의 하나인 연이 고조선에 쳐들어왔다.

이로 인해 고조선은 서쪽으로 2000리에 이르는 땅을 잃고 평양 지역으로 옮겼다. 이때 많은 고조선 주민들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 뒤 삼국 시대인 4∼7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먼저 삼국 간의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던 4∼5세기에 백제 북부 지역 주민들과 낙동강 유역의 가야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어 5세기 후반에 백제 귀족과 한강 유역의 주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7세기에 접어들어 신라가 3국을 통일하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망명객들이 넘어갔다는 것이다.

DNA를 통해 한국과 일본의 특별한 관계가 드러나자 아키히도 일왕은 월드컵 공동 개최 직전 환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왕의 후손이라고 밝힌 것이다. 환무 천황의 생모는 789년에 죽은 다카노 니이가사이다. ‘속일본기’는 다카노 황태후가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 태자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순타 태자는 505년 일본에 파견됐다가 8년 만에 죽었다. 짧은 일본 체류 기간 동안 그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 후손이 바로 일본의 황태후가 된 다카노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순타 태자의 후손들은 다카노 황태후가 나올 때까지 무려 270년 동안 일본 귀족 사회에서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는 명분으로 높은 지위를 유지하고 산 셈이다.

고대 고구려어가 일본어의 뿌리

일본인과 일본 문화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총지휘한 도쿄 대학 인류유전학자인 오모토 게이이치 교수 역시 대륙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온 도래인이 일본인의 80%를 형성했고 한반도가 그 길목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그는 도래인이 일본에 정착했을 무렵 사람들의 묘지가 있는 야마구치 현 도이가하마 인류학박물관에 가면 당시 묻혀 있는 사람들의 머리가 모두 한국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현대 일본어와 현대 한국어는 단어의 유사성이 15% 정도로 그다지 높지 않다. 핏줄이 가깝다면 말도 상당히 비슷해야 하는데 서로 말이 너무 다르다. 그 이유는 고대 고구려어가 일본어의 뿌리가 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대 한국어는 신라의 말이 뿌리가 됐고 그 후 훈민정음이 만들어지면서 상당한 변화를 겪었지만, 일본어는 이미 한반도에서는 사라진 고구려 언어가 뿌리가 됐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나오고 있다.

일본은 지리적 환경 때문에 독특한 문화를 유지했다. 일본 총면적은 영국의 2배이고 가장 가까운 대륙인 한국에서 177Km 떨어져 있다. 영국과 대륙 프랑스와 겨우 35.4Km 떨어진 것과 대조가 된다. AD 6세기 앵글로색슨족이 유럽 본토에서 영국으로 이주함으로써 영어가 여타 게르만 언어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영국이 유럽 본토에서 4번 침략을 당하고 1066년 이후 영국은 매 세기마다 대륙에서 전쟁을 일삼았지만, 일본은 16세기와 19세기에 대륙을 침략한 경우가 전부이다. 이러한 지리적 여견 때문에 일본은 더욱 고립될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영국보다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할 수가 있었다.

‘총(guns), 균(germs), 쇠(steel)’

“무기, 병균, 금속은 인류의 문명을 어떻게 바꿨는가”란 부제를 달고 있는 ‘총(guns), 균(germs), 쇠(steel)’는 1997년 발간 즉시 엄청난 스케일과 독특한 통찰력으로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퓰리처상 수상작이다. 국내에서도 서울대 도서관 대출1위 책으로 2003년 개정증보판에는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논문이 추가로 실려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일본 최초의 연대기는 712년부터 시작된다. 그 이전 시기는 크게 조몬과 야요이, 그리고 고분시대로 나뉘는데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1만2700년 전 빙하기에 일본 열도로 유입되어 이후 1만년 간 지속된 조몬인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한국과 서구에서는 기원전 400년을 전후해 한반도 남부로부터 벼농사와 함께 철기가 유입되면서 규슈 일대를 중심으로 300년경 고분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700년 간 활동했던 야요이인들이 일본인의 조상이라는 의견이 유력하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생물학에서 고고학까지 다양한 학문영역을 넘나들며 비록 그 규모는 명확하지 않지만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이주민들이 분명 현대 일본인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결론을 내린다.

재레드 교수가 내세우는 첫 번째 근거는 유전자 분석이다. 조몬인, 야요이인의 유전자를 현대 일본인과 아이누인들과 비교 분석했을 때 조몬인의 두개골은 현대 일본인이 아니라 아이누인과 가장 닮았다.

반면 야요이인들은 현대 일본인, 한국인과 닮았다. 야요이인의 비율은 일본 서남부에서 가장 높게 나타나고 일본 북부지역에서는 조몬인의 유전자 규성 비율이 우세하다. 따라서 19세기에야 일본 역사에 편입된 아이누인들이 조몬인의 후손일 확률이 크고 현대의 일본인들은 “근래 일본으로 이주해 온 민족에서 이어져 내려왔을” 거라는 의견이다.

이어 그는 양국 언어에 대해서도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기한다. 일본어와 아이누어, 혹은 일본어와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명백한 차이에 대해 조몬이나 야요이의 언어가 원래부터 현대 아이누어, 혹은 한국어와 그다지 유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현대 한국어는 신라어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의 한국어는 현재보다 훨씬 다양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실제로 일부 전해지는 고구려 단어는 한국어보다 오히려 일본어와 비슷하다.

따라서 일부에서 이야기하듯 언어의 차이보다는 외모나 유전자의 유사성이 보다 유력하다는 것이다. 재레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러한 결론은 일본과 한국, 양국이 최근 서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탓에 어디에서도 인기를 끌 만한 주장은 아닌 것 같다. 양국의 지난 역사는 서로에게 좋지 않는 감정을 품게 했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경우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피를 나누었으면서도 오랜 시간 서로에 대한 적의를 키워왔다. 하지만 동아시아와 중동에서의 이러한 반목은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수긍하기 힘들겠지만, 그들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양국이 고대에 쌓았던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비슷한 견해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의 서문에도 본격적인 답사에 앞서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은 고대사를 감추고 있다. 일본 고대사는 일본천황의 무덤이나 천황가의 역사적 진실까지 파헤쳐야 하기 때문에 속 시원한 연구가 진행되기 어렵다. 여기에 한국인이 적어도 야오이시대에 대거 이주한 것은 엄연한 사실로 밝혀졌다.

일본의 고대문명은 백제와 고구려, 신라, 가야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우리가 중국의 문물을 받아 들인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러나 통일신라 이후 일본과의 관계는 단절된다. 백제가 일본과 혈맹 수준의 관계였고 백제부흥 운동에 일본이 동참한 사실에 미루어볼 때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와 굳이 교류할 만한 유인이 없었을 것이다.

일본은 통일신라 이후에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고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조선을 뛰어넘었다. 그래서 우리는 고대사에 있어서 일본을 무시하고, 일본은 근대사에 있어서 우리를 무시한다. 우리 선조들이 고대에 일본에게 문물을 전달해줬다고 해서 우리가 우월해 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분명 우리와 다른 문화를 갖고 있으며 단지 고대 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문물을 전달해준 것이 원천이 되었을 뿐이다. 우리가 고대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그 시절에는 일본과 형제였다는 사실 역시 인정해야 한다.

이리하여 마침내 책을 펴내게 되니 국내편 때와는 달리 걱정과 두려움이 다가온다. 요즘은 한일관계와 국민정서를 생각할 때 나는 두 나라 국민 모두에게 환영 받지 못할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특히 한일 양국의 국수주의자들은 나에게 많은 화살을 퍼부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이 책을 펴내는 것은 이제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만천하에 드러내어 한일 양국이 공유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존과 공생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누군가는 쌍방에서 날아오는 독화살을 장풍으로 날려버리면서 당당히 맞서지 않고서는 한일 고대사의 유대를 성공적으로 복원할 수 없는 일이다. 현명한 독자들은 나의 이런 간절한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 믿으며, 쌍방에서 화살이 날아올 때 나를 지원해주면 고맙겠다.”

맞는 말로 대다수 한국인들은 위의 내용을 수용할 것이다. 반면 일본인들은 기겁하면서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부끄러운 아시아를 벗어 나고자 근대 시기 이후 현재까지도 탈아입구와 탈아입미의 길로 매진하고 있음은 일본은행 최고액권인 1만엔권에 새겨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4~1901)가 증명하고 있다.

일본은 ‘고대사 컴플렉스’ 때문에 한반도로부터 전래된 문화를 폄하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은 ‘근대사 컴플렉스’ 때문에 일본의 고대 문화를 모두 한국이 만들었다고 자만하며 일본 문화를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양국 모두 이러한 ‘역사 컴플렉스’를 극복함으로써 역사를 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화라는 것은 생명체와 같이 움직이면서 변모한다. 마치 호수에서 흘러 들어온 계곡의 물을 호수 본래의 물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의 독자성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국제 사회에서 공생하기 위한 자세일 것이다.

한일 양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우나 상호 컴플렉스 때문에 양국간의 문화교류와 대중들의 인식은 세계 다른 지역에 비해 현저하게 뒤처져 있다. 민족주의적 편협성을 초월하여 양국 모두 동아시아에서 당당히 독자성을 가진 문화적 주체 국가였다는 것을 서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인의 유전자 지도>

 

  1. 천하일가 사해동포(四海同胞)론

 

사해(四海)는 원래 ‘사방의 바다’를 의미하는 말로 ‘온 세상’을 뜻한다. 인종에 대한 편견이나 국가적 이기심 또는 종교적 차별을 버리고 인류 전체의 복지 증진을 위하여 온 인류가 서로 평등하게 사랑하여야 한다는 박애주의를 함의한다.

글로벌 시대, 세상은 지구촌이라고 할 만큼 가까워졌으며 유교식 표현으로 세계인은 한 가족이라는 ‘천하일가(天下一家)’시대인 것이다. 공자의 제자인 사마우(司馬牛)는 외아들이었다. 어느 날 공자가 아끼는 제자 자하(子夏)를 찾아와 괴로워하면서, “사람들은 형제가 모두 있는데 나만 혼자인 것 같다.”며 괴로워했다.

자하(子夏)가 이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군자가 공경하여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사람을 사귀는 데 공손하고 예절을 갖추면 세상 사람들이 다 형제라 하니, 군자가 어찌 형제가 없음을 근심하겠소(君子敬而無失 與人恭而有禮 四海之內 皆兄弟也 君子何患乎無兄弟也)”라고 대답했다.

사해(四海)는 온 천하를 지칭하며, 불교에서는 수미산(須彌山)을 둘러싼 바다를 말한다. 즉 온 세상 사람들은 모두 형제처럼 지내야 한다는 뜻이다. 서양 르네상스 시기에 영토나 언어, 문화 등을 넘어서는 데 의미를 두고 싹튼 코즈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곧 사해동포주의 (四海同胞主義)와 궤를 같이한다.

중국 북쪽의 이민족인 호족과 남쪽의 이민족인 월족이 한 집안이 되었다는 말로서, 온 천하가 한 집안과 같다는 뜻인 ‘호월지가(胡越之家)’는 동의어다.

1) 과연 국가(國家)는 무엇인가?

베이징대학의 중국·세계연구센터 판웨이 소장은 “국가(state)는 관가와 비슷하다” 고 했다. 동양 전통사회에서 국가라 함은 결국 관가(官家: 벼슬아치들이 나랏일을 보던 집)와 연결된다는 의미다. 한국에서도 전통적으로 국가란 의미는 ‘임금이 나라의 정치를 신하들과 의논하거나 집행하는 곳 또는 그런 기구’를 의미했던 조정(朝廷)과 비슷했다고 본 해석이다.

국(國)이라는 한자 자체가 이미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유명한 중국인 저술가 이중톈은 (이중톈 중국사 제7권, 진시황의 천하)에서 나라 국(國) 자에 대해 “방(邦)과 국(國)은 다르다. 국은 국도(國都) 즉 도시였다. 방은 여기에 주변의 농촌까지 합친 개념이었다.”라고 말한다.

중국 역사에서 국(國)이란 기원전 주(周)나라의 천자(天子)가 자신의 형제 또는 자식에게 봉(封)해 준 지역을 일컫는 글자였다. 당시 분봉(分封)하는 지역은 대개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였다. 그래서 국(國) 글자는 도시를 성곽처럼 둘러싼 모양을 상형문자로서 보여준다.

이 성곽도시 주변에는 당연히 농산물 등의 생산을 담당하는 ‘성밖 지역’이 딸려 있었고, 도시인 국(國)과 주변 농촌지역을 합친 개념이 방(邦)이었다는 설명이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작은 나라는 하나의 국(國都)과 시골로 이뤄졌고, 진(秦)-제(齊)처럼 큰 나라들은 여러 개의 국과 시골로 이뤄졌었다는 게 이중톈의 설명이다.

국(國)은 주(周)나라의 천자가 분봉해준 곳에 세워진 ‘도시국가’가 출발점이다. 여기에 ‘성밖 농촌’이 더해져 방(邦)으로 커졌다 하더라도, 그 방(邦)은 천하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렇기에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 춘추오패(春秋五覇)와 전국칠웅(戰國七雄) 등의 여러 나라가 있었지만, 당시의 중국인들은 천하를 하나로 생각했기에,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가는 데 하등의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공자(孔子)는 비록 국적은 노(魯)나라 사람이지만 자신의 정치를 세상에 펴기 위해 천하를 주유(周遊)하였다. 풍찬노숙(風餐露宿)으로 동가식 서가숙하며 하며 여러 나라에서 관직을 구한 공자의 머릿속에 “나는 노나라 사람이니까 노나라에서만 정치를 해야 한다는 좁은 관념은 없었다.   

공자는 ‘상갓집 개(喪家之狗)’처럼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한자리를 구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상황, 자리를 얻지 못하여 돈도 없는 상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처지가 계속됐다. 공자 개인은 권력을 잡는 데 실패했지만 동아시아에서 유가(儒家)가 2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집권 세력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2) 21세기의 천하일가론 

대동(大同)사회는 공자와 맹자등 개혁 정치가들이 지향했던 이상사회였다. 동양 사회는 대동(大同)→소강(小康)→난세(亂世)로 시대를 분류한다. 중국 공산당은 2003년 당시를 소강(小康)사회로 평가하면서 앞으로는 대동사회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식 사회주의의 진로를 동양 고전에서 찾았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도 미래 방향을 둘러싼 진통이 계속되고 있지만 동양 고전에서 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좌우 어느 쪽에서도 하지 않는다. 대동, 소강, 난세의 편린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의 진로에 대해 조금은 깊이 있는 고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천하주의자로 바로 세계주의 혹은 사해동포주의다. 천하주의자가 보기에 국가는 천하의 한 분자에 불과하며 대가족 안의 소가정과도 같다. 그래서 진정한 인간은 천하에 속할 뿐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이 적어도 춘추전국시대 중국인의 관념이었다.  

21세기 한국인은 이미 머리로, 그리고 몸으로 천하인(天下人)으로 살아가고 있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중국인들이 세상을 그리 느꼈듯이 “천하엔 여러 나라가 있고 그 중 한 나라에 내가 속해있지만, 내가 이 나라에만 전적으로 귀속되는 건 아니고, 나는 천하의 소속”이라는 생각이 21세기 한국인에겐 너무나 자연스럽다.

생태문명의 전환을 모색할 때 동아시아 문명의 ‘천하일가(天下一家)’ 이론은 대한민국이 제시할 철학과 가치의 역사적 뿌리이다. 서구 문명의 평화론이나 국제정치의 패권이론이 아닌 동아시아 문명에 기원을 둔 천하일가(天下一家)’ 세계평화론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논어, 대학, 중용 등 동아시아의 고전 속에 있다.

한·중·일 삼국은 공히 서구의 경험과 가치관으로 판단하기 힘든 전혀 다른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전통을 지닌 사회이다. 저명한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John Naisbitt)는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이며 그 중심에는 중국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중국과 한국 및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은 ‘서구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시아적인 방식’으로 현대 사회를 이루어가고 있다고 보았다.

바야흐로 천하가 한 집의 사사로운 소유물이 아니라는 의미의 천하위공(天下爲公)의 시대이다. 천하의 인민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회가 바로 대동(大同)사회로 공자가 말하는 대동사회는 천하일가(天下一家)의 참으로 이상적인 유토피아이다.

어질고 능력 있는 자를 뽑아서(選賢與能)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을 닦게 하니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지 않았고, 자신의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인들은 편안하게 일생을 마치게 했으며, 젊은이는 다 할 일이 있었고 어린이는 잘 자라날 수 있었으며, 과부·홀아비·병든 자를 불쌍히 여겨서 다 봉양했다. 남자는 직업이 있고 여자는 시집갈 자리가 있었다”

 

  1. 베세토·글로벌튜브는 ‘천하일가의 마실길’

 

오늘날 지구환경과 세계경제가 당면한 두려운 현실은 전세계적으로 젊은 층의 실업률이 갈수록 높아지고, 환경 파괴와 기존 금융시스템이 붕괴되는 등의 신호가 이를 증명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유일한 행성 지구에서 건강하고 공정하고 의미 있게 사는 법에 대한 논의를 일찍 시작할수록 우리 모두에게 더욱 이로울 것이다.

화성(火星, Mars)이나 또다른 행성(Planet)으로 이주하지 않는 이상 자원은 유한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물질도 한계를 지녔기에 결국 경제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제로’상태가 될 것이며 한국처럼 작고 성장이 집약된 국가는 문제가 더욱 빨리 닥칠 수 있다.

1) 생태문명의 인프라가 될 베세토튜브

특히 에너지 부족은 이미 당면한 문제다. 가장 먼저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당연한 듯 소비되고 있는 에너지에 대해 지금과 같은 과도한 소비가 필요한지 고찰해봐야 한다.

선박은 너무 느리고 비행기는 과다한 온실가스를 지구상공에 배출하여 자연을 통한 회복보다 빠른 속도로 바다와 대기를 오염시키고 있다. 석유정점을 맞이하는 21세기 한정된 화석연료를 흥청망청 낭비해서는 안되며 결국 22세기 탈 석유사회시대에는 항공 교통모드는 종말을 고하게 되고 신재생 에너지를 사용하는 관도(管道, Tubeway)모드의 교통수단이 최상위 교통모드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석유에너지 고갈에 따른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21/22세기형 최상위 교통계층(transport hierarchy) 의 지속가능 교통 시스템(Sustainable transport system)은 제5 교통모드인 “관도(管道, tubeway)” 가 될 것이며 5대양 6대주를 연결하는 삼상궤도(Three Phase Track)방식의 범구관도(汎球管道, Global Tube Way)를 구축함으로써 기존 도로, 수상, 철도와 특히 항공모드 의존을 축소함으로써 지구촌 인구 100억명 시대의 교통 인프라를 재구축하여야 한다.

빠르고 저렴한 운송수단은 오염을 낮추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급격히 줄여줄 뿐만 아니라 고도로 연결된 사회(Hyper-connected society)를 낳을 것이다.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과 진지한 지구 공학적 접근이 필요하며 관건은 최소의 비용으로 5대양 7대주를 연결하는 진공 튜브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것과 함께 음속에 가까운 속도를 최소 에너지로 구현하는 것이 될 것이다.

2) 천하일가, 사해동포의 마실길이 될 베세토·글로벌튜브

베세토튜브(北首东管,  ベセトチューブ, besetotube)에서 시작하여 아시아튜브(ASEAN), 태평양튜브(NAFTA), 북극해튜브(EU)로 연장되는 글로벌튜브(汎球管道, Global Tube)는 전세계인이 한 가족이 되는 ‘마실길’이다.

베세토튜브, 아시아튜브, 태평양튜브, 북극해튜브, 대서양 등으로 연장될 글로벌튜브는 5대양 6대주를 연결하는 지구공학적 차원의 사상 최대규모 프로젝트이다. 베세토튜브연구회가 추진하는 기술표준은 하이퍼루프 등 기존 방식과는 달리 다중튜브(Multi tube)와 삼상궤도(Three Phase Track)기술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베세토튜브는 대략 200조원의 건설비와 5~10년간 의 공사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베세토튜브를 연장하는 아시아튜브, 태평양튜브, 북극해튜브, 대서양 등의 5대양 6대주를 연결하는 글로벌튜브를 완성하는데 대략 50~100년의 기간이 걸릴 것이며 1억명이 넘는 노동자가 필요할 것이다.

한·중·일3국은 문화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지만 3국 모두 빠른 고령화 속도에 힘입어 고령화에 대한 관심은  3개국 모두에 핵심적 공통 사회 이슈로 자리 잡고 있다. 

고령화 현상이 주목받는 이유도 인구 고령화로 이들 국가의 경제가 큰 영향을 받고 이에 따라 세계경제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인구 고령화는 공적연금 재정지출의 증가, 노동인구 감소와  및 노동생산성 하락, 노인 의료비와 노인 복지수요 증가로 직결된다. 한·중·일 3국의 고령화 현상이 세계경제 파탄의 뇌관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제3의 길(the third way)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22세기 생태문명 사회를 살아갈 사해동포(四海同胞, Cosmopolitan)와 함께 상생하고 공영하는 것만이 산업혁명 이후 식민지와 자원약탈형의 서구 근대문명을 초극(超克)하는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s)를 증명하는 제3의 지름길로 한·중·일 3국이 이 길을 활짝 열어야만 진정한 아시아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세계를 일일 생활권으로 만들어 진정한 글로벌 시대를 열어줄 베세토· 글로벌튜브는 아중해(亞中海)공동체 형성의 기본틀을 형성하고 탈 산업화 시대이자 ‘생태문명(生态文明, Ecological Civilization)’의 세기인 22세기 한중일이 모범적인 생태 패권국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하는 기본 플랫폼이 될 것이다.

Post Author: beseto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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