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의 ‘해동제국기’로 본 대일관계와 베세토튜브

  1. 신숙주(申叔舟)의 생애
  2.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안보상황
  3. 조선초 외교국방의 핵심인물인 신숙주
  4. 신숙주는 변절자인가, 유능한 재상인가?
  5. 대일관계 개선과 베세토튜브

  1. 신숙주(申叔舟)의 생애

신숙주(申叔舟·1417~1475)는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를 비롯해 학문과 정치, 외교, 안보 등 다양한 국정 분야에서 경력을 쌓고, 많은 업적을 남긴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신(名臣)이다. 하지만 세조의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하여 절개를 저버리고 영달을 선택한 변절자의 표상처럼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일세를 풍미한 문무를 겸한 훈신‘ 혹은 ‘숙주나물보다 못한 추한 변절자‘라는 상반되는 표현들을 떠올리게 하는 신숙주는 조선 태종 17년(1417) 6월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1475년(성종 6) 세상을 떠나기까지 조선 초기 통치 체제 확립과 대외 관계의 관장, 학문의 발전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였으며 그의 생애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는 1439년(세종 21)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1441년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로 입직(入直)하여 1450년까지 10여 년간 학문 연구와 정치적 경륜을 쌓은 시기이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집현전을 중심으로 진행된 활발한 학술·문화 활동의 중추 역할을 하면서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1443년(세종 25) 27세 때 서장관으로 통신사행을 수행하여 일본을 다녀온 것도 이때였다.

후기는 1452년(문종 2)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을 수행하면서 그와 인연을 맺은 이래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후 활발한 정치 활동을 하였던 시기이다. 이때 그는 판서, 영의정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국가의 추기(樞機)에 참여하였고, 네 차례에 걸쳐 공신 책봉을 받았으며, 부원군(府院君)의 지위에 올랐다.

신숙주는 세조가 ‘그대는 나의 위징(魏徵)’이라 일컬었고, 성종이 ‘나의 관중(管仲)’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세조대와 성종대의 정치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다. 특히 그는 1467년(세조 13) 예조 판서에 임명된 이래 죽을 때까지 외교와 문교(文敎)를 관장하면서, 당시까지 불안정하고 체계화되지 못한 대외 관계의 개혁과 체제 정비에 크게 공헌하였다.

신숙주는 자라면서부터 보통 어린이들과 달랐고, 자라서 공부를 시작하자 모든 경서와 역사책을 한 번 읽으면 기억할 정도였으며 글재주가 뛰어났다고 전한다. 신동(神童)으로 불린 그는 젊은 시절부터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21세 때인 1438년(세종 20) 과거에 합격했고, 처음으로 실시된 진사시험에는 장원을 차지한 후 생원시험에도 합격하고, 또한 이듬해에는 친시문과(親試文科)에도 급제하였으며 집현전에서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 연구에 종사하게 된다.
  
세종은 “올바른 정치는 올바른 도리에서 나오며, 올바른 도리를 모르고서는 성인지도(聖人之道)를 따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신숙주는 평소 장서각(藏書閣)에 들어가 새로운 책을 열심히 읽고 동료들 대신 숙직을 하면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했다.

이러한 학문에 대한 열성이 세종에게까지 알려졌으며, 하루는 책을 읽다가 잠이 든 그를 발견하고 세종이 직접 어의(御衣)를 하사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연려실기술, 練藜室記述)
  
그는 타고난 신동으로 노력하는 수재이자 언어 천재였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신숙주의 뛰어난 언어 실력이었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그는 “중국어·일본어·몽골어·여진어 등의 말에 능통해서 때로 통역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뜻을 통했다. 뒤에 손수 모든 나라의 말을 번역하였는데 통역들이 이에 힘입어서 스승에게 일부러 배울 것이 없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보통 5개의 국어에 능통한 사람을 보고 언어 천재라고 한다. 그러나 여러 문헌을 통해 전해오는 기록을 보면 신숙주는 종래 설총(薛聰)이 사용했던 이두(吏讀)는 물론, 중국어·일본어는 통역이 필요 없었고, 몽골어·여진어에도 능통했고, 인도어와 아라비아 문자까지 7~8개의 언어를 터득하고 있었다고 한다.
  
신숙주는 당시 만주의 요동에 유배되어 있었던 명의 한림학사(翰林學士)이자 음운학자인 황찬(黃瓚)을 13번이나 찾아가 음운(音韻)과 어휘에 관해 의논하고 관련 지식을 얻었다.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황찬은 신숙주의 한어(漢語) 수준이 상당히 높아 막힘 없이 대화하고 말을 들으면 빨리 깨닫는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명의 학자가 사신으로 조선에 왔을 때도 함께 운서(韻書)와 음운을 연구했는데 그의 학문 열정에 감복한 명 사신은 잔치도 마다하고 그와 토론, 담론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훈민정음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들 언어를 비교 분석하고 조선인의 발음과 대조하여 유사점과 차이점을 가려내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다.

또한 한글 창제 후 중국 한자음을 새 표음문자인 한글로 표기하는 표준 말글 사업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443년(세종 25) 훈민정음의 해설서를 집필하고 1445년에는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보완했으며 1446년에는 《훈민정음해례본》을, 그리고 1448년에는 우리나라의 전승 한자음을 정리하여 표준 한자음을 설정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하였다.  

신숙주는 문장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가 약관의 나이에 통신사행의 서장관으로 선발된 이유도 문장력 때문이었다. 실제 그는 외교 관계에서 사명(詞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예조의 일을 관장하면서 중요한 외교 문서를 직접 작성하였다. 또한 외국어에도 능통하여 일본 사신과 여진 사신을 접할 때는 통역을 통하지 않고 직접 접견하였다고 한다.

학문에도 무척 뛰어나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을 찾은 한림학사 예겸(倪謙)으로부터 굴원(屈原)의 반열에 오를 만한 동방의 명인이다; 라는 칭찬을 받았고 훈민정음 창제에도 깊이 관여한다. 음운학과 어학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 홍무정운(洪武正韻) 한글주석서의 책임편찬도 맡았다.

<신숙주 초상과 해동제국기>

 

  1.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안보상황

동아시아 해역의 약탈자, 왜구

1350년 2월, 『고려사』에는 왜구의 출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왜구가 고성, 죽림, 거제 등지를 노략질했다. 합호 천호 최선과 도령 양관 등이 이를 격파하고, 300여 명의 적을 죽였다. 왜구가 우리나라에 침입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왜구가 출몰하던 이 시기에 동아시아 삼국의 정세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중국 대륙은 원·명의 교체기였고, 한반도는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하였으며, 일본은 천황이 두 명인 남북조시대였다. 이 혼란기를 틈타 왜구들이 한반도와 산동 반도 지역에 창궐했다.

왜구는 적을 때는 몇 척, 많을 때는 5백 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구성하여, 500회 이상 한반도에 침범했다. 왜구는 동해, 남해, 서해의 연해지역은 물론 내륙 깊숙한 곳까지 약탈을 했다. 낙동강과 섬진강의 곡창지대와 조운을 위해 강 곳곳에 설치한 조세창고인 조창을 습격했다.

소나 말 등 가축은 물론 사람을 납치했다. 그리고 부녀자를 겁 탈하고 어린아이를 살해했다. 왜구가 가장 극심했던 1380년 8월, 『태조실록』에는 “서 너 살짜리 여자아이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쌀을 넣고 고사를 지낸 뒤 그 쌀로 밥을 해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1392년, 한반도와 일본, 두 지역에서 모두 새로운 정권이 탄생했다. 조선왕조와 무로마치(室町)막부이다. 조·일 양국은 모두 신흥제국인 명과의 새로운 국제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분주하게 사절을 파견했고, 드디어 명·조선·일본 사이에 새로운 국제질서인 책봉체제가 수립되었다. 소위 사대교린의 외교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했고, 그 틀 안에서 일본과의 교린체제를 완성해 나갔다. 그리고 그 선두에 신숙주가 서 있었다.

약탈의 시대에서 공존의 시대로

당시 조선왕조의 대일정책의 기본목표는 왜구금압(倭寇禁壓)과 통교체제의 정비였다. 그래서 건국직후부터 막부장군을 교섭상대로 하여 외교를 벌였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왜구에게 영향력이 있던 유력한 제후나 왜구 세력들과 직접 교섭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구주탐제(九州探題)나 대마도주 등에게 왜구금압을 의뢰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여러 종류의 특권을 부여하여 통교체제를 완성하여 갔다.

삼포 제도, 서계, 도서, 문인, 금어약조, 세견선제도 등을 통해 왜구를 통교자로 전환시켜 갔다. 그리고 1443년 신숙주를 통신사로 파견하여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함으로써 왜구문제를 일단락 지었고, 삼포(三浦)를 통하여 일본과의 공존⋅공생을 모색해 나갔다.

이와 같이 신숙주는 왜구문제를 총체적으로 해결했던 외교의 달인이었으며 한일관계를 왜구(倭寇)에 의한 약탈(掠奪)의 시대에서 삼포를 통한 공존(共存)의 시대로 바꾸어 간 인물이었다.

원컨대, 국가에서 일본과의 화친을 끊지 마소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는 순수한 ‘일본견문록’이라기보다는 일본을 이해하고, 일본에 대응 해가는 외교 실무를 위한 하나의 지침서였다. 그래서 이후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대일 외 교관계에서 항상 전례가 되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도 『통문관지(通文館志)』, 『춘관지(春官志)』, 『증정교린지(增訂交隣志)』등의 외교실무서의 기본 전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에서는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는 일을 논의할 때마다, 신숙주를 거론했다. 영의정이던 한명회는 “지금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고자 함에는 반드시 고려조의 정몽주나 아조(我朝)의 신숙주와 같은 인물을 택하여 파견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고, 우의정인 홍윤성은 “일본에 관한 일을 갖추어 익숙히 알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신숙주 한 사람뿐이다.

이제 이미 서거하였으니 만일 그들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 나라 산천의 구부러짐과 바름, 습속의 좋아하고 숭상하는 바를 누가 알 것인가”라고 했다. 그리고 신숙주 자신도 일본과의 우호교린을 강조하면서 “전하, 원컨대 부디 일본과의 화친을 끊지 마소서”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눈을 감았다.

신숙주의 외교능력뿐만 아니라, 『해동제국기』의 내용을 대변할 수 있는 구절이다. 이러한 점에서 『해동제국기』는 15세기의 한일관계는 물론이고, 동시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 및 해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사료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언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훈민정음 창제뿐 아니라 외교에 혁혁한 공헌을 했는데, 일례로 그가 저술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대일외교의 지침서로서 후대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세계화시대를 맞아 신숙주의 변절에 관한 ‘불편한 진실’과 변절의 이름 아래 묻혀버린 그의 여러 실적을 재조명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1. 조선초 외교국방의 핵심인물인 신숙주

통찰력과 외교적 안목으로 저술한 《海東諸國記》

언어 천재의 뛰어난 외국어 실력은 자연히 외교와 인연을 맺게 된다. 세종 원년 대마도를 정벌한 뒤 소원했던 일본은 외교관계를 재개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달라고 조선에 요청해 왔다. 1442년(세종 24) 훈민정음이 반포된 뒤, 세종은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기로 하고 글 잘하는 선비를 서장관으로 삼기로 하였다. 집현전 학사로서 일본어 등 외국어에 능통한 신숙주가 선택된 것은 당연했다.
  
이때 신숙주는 과로로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일어난 직후였으나 자청해서 가겠다고 하였다. 세종도 그의 건강을 염려했으나 마침내 승낙했다. 세종이 신숙주를 서장관으로 뽑아 보낸 뜻은 단순히 그의 언어 능력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외교도 고려한 것이었다.

왜구(倭寇)에 시달려온 세종은 그들을 책임 있는 일원으로 교린(交隣)의 질서에 편입시키기 위해 우리의 앞선 학문과 문화를 일본에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 적임자가 신숙주였고 그를 외교관으로 등용하게 된 것이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서장관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보좌하면서 사행(使行)을 기록하고 외교 문서의 작성을 맡은 중요한 직책으로 사신단의 서열 3위에 해당하여 당시의 가장 뛰어난 젊은 문관(4~6품)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서장관은 외교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특히 뛰어난 사람이 임명되는 직책임을 감안할 때 세종은 집현전 학자로 있던 신숙주를 신뢰하고 높게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신단 일행이 일본에 도착하자 가는 곳마다 일본의 문사와 승려들이 찾아와 신숙주에게 시나 글씨를 요청하고, 학문을 논의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서슴없이 부탁을 들어주고 거침없이 답변해 그들을 감탄하게 했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본 본토와 대마도를 거치면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여러 외교 사안을 조율했다. 특히 대마도주를 설득해 세견선(歲遣船)의 숫자를 확정한 것은 중요한 성과였다.
  
이때 신숙주는 ‘문화외교’를 전개하면서도 냉철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일본을 관찰하고 그들의 동정을 살펴 일본 지도를 작성하고 제도·풍속도 기록했다. 신병을 무릅쓰고 출발했지만, 신숙주는 장기간 동안의 외교적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성공적인 외교관으로서의 출발이었고 외교 분야에서 많은 치적을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신죽주의 외교 활동은 그가 당시 조선과 직접적으로 관계있던 명나라, 여진, 일본을 직접 견문하거나 접함으로써 당시 조선의 대외 관계에 대하여 가장 종합적인 시각을 소유할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일 관계에서는 1443년 통신사행의 서장관으로 일본 교토까지 가서 사행을 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쓰시마 섬에 들러 쓰시마 섬 도주를 설득하여 계해약조를 체결하는 데 일조하였다. 대명 관계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명나라에 사행을 다녀왔다. 1452년 사은사로 수양 대군을 수행하여 명나라에 다녀왔고, 1455년(세조 1)에는 주문사(奏聞使)로 다시 파견되었다.

여진(女眞) 관계에서는 1459년(세조 5)에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로 여진족 종족 간의 불화를 조정하였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는 모린위(毛隣衛) 야인(野人)을 1460년과 1461년 두 차례에 걸쳐 정벌함으로써 북쪽 변경을 개척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와 같은 활동을 바탕으로 신숙주는 세조대와 성종대 초기 사대교린(事大交隣) 외교의 사무를 총괄하였으며, 일본 문제에서도 당대 제일의 전문가였다. 그가 죽은 후 사가들은 그를 평해 “친히 일본에 건너가서 그 나라의 산천(山川), 관제(官制), 풍속(風俗), 족계(族系)에 대하여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해동제국기』를 지어 성종에게 올렸다.”라고 하였다.

『해동제국기』는 1471년(성종 2) “바다 동쪽 여러 나라와 조빙하고 왕래한 연혁(沿革)과 그들의 사신을 접대하는 규정 등에 대한 구례(舊例)를 찬술(撰述)하라.”는 성종의 명에 따라 당시 예조 판서였던 신숙주가 저술한 것이다.

그는 조선과 일본의 옛 전적을 참고하고 일본에 사행 갔을 때의 견문, 오랫동안 예조에서 근무하며 얻은 외교 경험, 성종대 초기 주로 자신에 의해 활발히 추진되었던 대일 외교 의례의 개정 등 당시 사정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해동제국기』를 완성하였다.

『해동제국기』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 지도 :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 유구국도(琉球國圖) 등 지도 7장

○ 「일본국기(日本國紀)」: 천황대서(天皇代序), 국왕대서(國王代序), 국속(國俗), 도로리수(道路里數), 8도 66주

○ 「유구국기(琉球國紀)」: 국왕대서(國王代序), 국도(國都), 국속, 도로리수

○ 「조빙응접기(朝聘應接紀)」: 사선정수(使船定數) 등 조빙 응접에 대한 29개 항의 규정

신숙주는 책의 서문에 “이웃 나라와 사신이 왕래하고, 풍속이 다른 사람들을 어루만져 접대하려면 반드시 그들의 형편을 알아야 한다”라고 저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해동제국’은 일본 본토와 구주, 대마도, 유구국(현재의 오키나와) 등을 말한다. 신숙주의 서문과 7장의 지도,〈일본국기(日本國紀)〉,〈유구(琉球)국기〉,〈조빙(朝聘)응접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일본국기〉에서 산천의 경계와 요해지(要害地)를 지도로 작성하고 그들의 제도와 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과 병력의 다소, 영역의 원근, 사선(私船) 내왕의 절차, 우리 측 관궤(館餽·객사로 보내는 음식)의 형식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의 일본 지도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목판본 지도로서 현재 전해지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랜 지도로 평가받고 있다. 

신숙주는 특히 일본의 풍속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해동제국기”에 인용된 15세기 당시 일본 풍속의 면면을 살펴보자.

‘나라의 풍속을 보면 천황의 아들은 그 친족과 혼인하고, 국왕의 아들은 여러 대신과 혼인한다. …무기는 창과 칼 쓰기를 좋아한다. …음식할 때는 칠기를 사용하며 높은 어른에게는 토기를 사용한다.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은 없다.

남자는 머리털을 짤막하게 자르고 묶으며, 사람마다 단검(短劍)을 차고 다닌다. 부인은 눈썹을 뽑고 이마에 눈썹을 그렸으며, 등에 머리털을 드리워 그 길이가 땅까지 닿았다.

남녀가 얼굴을 꾸미는 자는 모두 그 이빨을 검게 물들였다. …집들은 나무 판자로 지붕을 덮었는데, 다만 천황과 국왕이 사는 곳과 사원에는 기와를 사용했다. 사람마다 차 마시기를 좋아하므로, 길가에 다점(茶店)을 두어 차를 팔게 되니 길가는 사람이 돈을 내고 차 한 주발을 마신다.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모두 그 나라 문자를 익히며, 오직 승려만이 경서를 읽고 한자를 안다. 남녀의 의복은 모두 아롱진 무늬로 물들이며, 푸른 바탕에 흰 무늬로 한다. 남자의 상의는 무릎까지 내려오고 하의는 길어서 땅에 끌린다.’

이 글에서 보이는 15세기 일본의 풍속은 오늘날과 거의 유사해 흥미롭다. 일본의 사무라이 전통, 젓가락 문화, 차를 즐기는 풍속 등이 이 책 곳곳에 나타나 일본 전통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조선의 대일외교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은 습성이 굳세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능숙하게 쓰고 배 부리기에도 익숙합니다.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을 진무(鎭撫)하기를 법도에 맞게 하면 예를 갖추어 조빙(朝聘)하지만, 법도에 어긋나게 하면 곧 방자하게 노략질을 합니다”고 일본을 평가한 뒤, 이적(夷狄)을 대하는 방책은 “외정(外征)에 있지 않고 내치에 있으며, 변어(邊禦)에 있지 않고 조정(朝廷)에 있으며, 전쟁에 있지 않고 기강(紀綱)을 진작하는 데에 있습니다”고 하였다.

이 가운데 「일본국기」와 「조빙응접기」가 분량으로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내용으로도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대일 외교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는 『해동제국기』가 많은 자료를 집대성하고 있어 가장 자세하다.

또한 성종대 초기의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사료 가치가 높다. 그래서 『해동제국기』는 조선의 대일 통교상의 ‘교범(敎範)’이 되었고, 조선 후기에도 통신사행원들이 일본에 갈 때 반드시 가지고 가는 필수품이었다.

『해동제국기』는 신숙주 개인의 사행록이라기보다는 왕명에 따라 찬진(撰進)된 ‘외교 자료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문에 그의 일본관과 대일 외교에 관한 견해가 밝혀져 있고, 「일본국기」의 ‘국속’과 ‘8도 66주’ 등에는 자신의 견문에 바탕을 둔 일본 인식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해동제국기』를 중심으로 신숙주의 일본 인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 민족관과 대일 정책에 관한 문제이다. 신숙주도 기본적으로 화이론적 관점에서 일본을 이적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는 『해동제국기』 서문에서 일본을 ‘이적(夷狄)’이라고 표현하면서, 이 책의 저술 목적도 ‘이적을 대하는 방책’의 일환이라고 하였다. 또 일본의 모든 통교자에 대해 ‘내조(來朝)’라고 표현하여 화이관적 인식을 드러냈다.

일본 민족의 성격에 대해 그는 『해동제국기』 서문에서 “우리나라는 그들이 오면 어루만져 주고 급료를 넉넉히 주어서 예의를 후하게 해 왔는데도 저들은 관습적으로 예사롭게 여기며, 참과 거짓으로 속이기도 하고 곳곳마다 오래 머무르면서 기한을 경과한다. 변사(變詐)하기를 온갖 방법을 다 쓰며 욕심이 한정이 없고 조금이라도 의사에 거슬리면 험한 말을 한다.”고 하여 약속을 잘 어기며 이(利)를 탐하는, 무력이 강한 민족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일본 민족관을 가진 신숙주의 대일 정책은 어떠하였을까? 신숙주는 일본 이적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일본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 대해 ‘해동의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큰 나라’라고 하면서 대일 정책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이웃 나라와 수호(修好)·통문(通問)하고, 풍속이 다른 나라의 사람을 안무 접대할 적에는 반드시 실정을 알아야만 예절을 다할 수 있고, 예절을 다해야만 마음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듣자 옵건대 “이적을 대하는 방법은 외정(外征)에 있지 않고 내치(內治)에 있으며, 변경의 방어에 있지 않고 조정에 있으며, 전쟁을 하는 데 있지 않고 기강을 진작하는 데 있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이제야 징험(徵驗)이 됩니다.

신숙주가 『해동제국기』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그의 대일 정책의 기본은 무력적 대응보다 외교를 통해 화평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풍속이 다른 일본의 실정을 잘 알아야 하고 예의와 성의를 다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그들이 통교하러 오면 어루만져 주고 급료를 넉넉히 주는 ‘증여 무역’과 예의로 교화하는 방책을 건의하였다. 그는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가 ‘사방에서 적을 맞이하는 형세’라고 하여 국방의 어려움을 지적하면서 외교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둘째, 일본의 정치 형태와 정치권력, 조선 조정과의 외교 교섭의 주체에 대한 그의 인식이 어떠하였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일본의 정치 체제에 대해 신숙주는 “국왕 이하 여러 대신들은 모두 분봉된 땅이 있어 봉건 제후처럼 세습한다.”라고 하여 중국의 봉건 제도와 같은 지방 분권적인 체제로 보았다.

또 당시 막부와 지방의 제후 세력 간의 권력 관계에 대해서도 정확한 관찰력을 보여 주었다. 실제로 신숙주는 무로마치 막부와 지방 영주의 세력 관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것은 왜구 금압과 관련하여 조일 통교의 기본 목적과도 관계가 깊은 문제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는 막부 쇼군과 천황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천황은 국정과 이웃 나라와의 외교 관계에도 일절 간여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천황이 내정뿐만 아니라 외교에 대해서도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였다. 따라서 조선 조정의 외교 교섭 대상에 대해서는 막부 쇼군이 ‘일본 국왕’으로서 조선 국왕과의 대등한 지위를 갖는다고 일단 인정하였다.

그러나 신숙주는 일본 천황이 대내외적으로 실권이 없다 할지라도 상징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임을 인식하였던 듯하다. 그래서 그는 『해동제국기』 ‘천황대서’에서 일본 천황에 대해 최초로 본격적인 기록을 남겼다.

일본 천황에 대해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세히 기술한 것은 이전의 다른 조선 지식인과 비교해 독특한 점이라 하겠으며, 은연중에 조선 국왕과 동격의 외교 교섭 대상 주체는 막부 쇼군이 아닌 천황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신숙주가 ‘막부 약체관’에 근거하여 막부 쇼군과 조선 국왕이 동등한 의례를 갖추는 방식에 대해 의문을 표하였지만,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개혁 의사는 표명하지 않았다. 당시 현실적으로 막부 쇼군이 대외적으로 일본 국왕으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고 있었고, 천황은 외교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숙주의 독자적인 일본 천황관과 그에 따른 외교 의례상의 문제 제기는 후대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인식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건너간 통신 부사(通信副使)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강조하여 외교 분쟁으로 비화(飛火)되었고, 조선 후기에 와서도 계승되어 하나의 명분론으로 계속 제기되었다.

셋째, 일본의 경제와 사회에 대한 인식이다. 일본의 경제에 대해 신숙주는 사행 시 일본에서 견문한 것을 바탕으로 화폐 사용의 일반화와 상업의 발달을 인정하였으며, 하카다를 중심으로 한 해외 무역도 활발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당시 조일 무역과 관련하여 일본에서 들어오는 주된 수입품과 특산물이었다.

당시 조일 관계에서 조선은 왜구금압(倭寇禁壓) 등 정치적인 측면에 비중을 두었지만,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도 결코 작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8도 66주’에서 당시 지배 계급의 수요와 무기 제조상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조선에서 산출되지 않아 일본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었던 유황, 금, 동, 수철, 철, 염료, 약재, 호초 등에 대해 산지별로 나누어 상세히 기록하였다. 

신숙주가 일본의 사회적 성격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없지만 일본인이 무술에 정련(精練)하고 창검(槍劍)을 잘 쓰며 주즙(舟楫)에 익숙하다는 점과 형벌 제도가 엄격하다는 점 등을 기술하여 일본 사회가 상무적(尙武的) 사회임을 지적하였다.

넷째, 일본의 문화에 대한 인식이다. 신숙주의 일본 문화에 대한 기록은 정치나 경제에 비해 매우 간략한 편이지만 특징적인 것은 일본의 ‘이국적’ 문화와 풍속에 대해 가치 판단을 자제하고 그 문화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풍속에 대해서는 『해동제국기』 ‘국속(國俗)’에서 간략히 기술하였다. 그런데 그는 일본의 기이한 풍속, 예컨대 이를 검게 물들이는 풍습과 매춘하는 풍습 등에 대해서도 담담히 소개할 뿐 그것을 이적시하거나 야만시하지는 않았다. 이는 『해동제국기』 서문에서 언급한 “풍습이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접대하기 위해서는 그 실정을 알아야 한다.”는 자세와 서로 통하는 것이다.

일본 풍속에 대한 신숙주의 이러한 가치 중립적인 태도는 각 민족의 문화적 독자성을 인정하려는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천황대서’에서 일본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한 것도 같은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1471년에 1차로 완성된 이후 일본과의 외교적 내용이 계속 보완되었다. 예를 들어 왜인들이 거주하던 삼포(일본에 개항한 세 항구)의 상황에 관한 자료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이후 대일외교에 있어 중요한 준거가 되어 외교협상에서 자주 활용되었다.

후대에 이르러서도 이수광(李晬光)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說)》,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등에도 인용되어 있고 이후 조선 후기까지 일본으로 가는 사신들이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외교 지침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이후에 일본 사행을 떠나는 통신사들의 필수 서책이 되었다.  

“해동제국기”에서는 그의 철저한 성격이 배어나 빈틈없는 성품이 외교적 수완의 바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재주와 능력 그리고 문재(文才)가 있었기에 한글 창제와 같은 민족문화 대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워낙 자학(字學)에 타고난 재질을 갖췄기에 그는 음운 연구에 매진했고, 중국 음을 한글로 표기하기 위해, 왕명에 따라 성삼문과 함께 유배 중이던 명나라의 황찬(한림학사)을 무려 열 세번이나 찾았다. 교통의 불편함을 무릅쓴 이러한 행보를 통해 그의 지독한 성실성을 헤아려 볼 수 있다.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안보 위협을 극복한 인물
신숙주는 세조 즉위 후 병조판서로 임명되어 국방과 안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조선의 고질적인 안보 위협은 북로남왜(北虜南倭), 즉 북방의 여진(女眞) 과 남방의 왜구(倭寇)였다.

오래도록 변방을 약탈하던 여진족과 해안가를 통해 충청도까지 올라오는 왜구들에 대한 강경 진압과 엄한 처벌이 필요했지만 조정의 의견은 일치되지 않았다. 신숙주가 나섰다. 그가 직접 자신이 출정하여 앞장서 정벌할 수 있다고 강경 토벌을 주장하자 세조는 동의하였다.

명나라 수군(왼쪽)과 교전하는 왜구(오른쪽). 왜구는 당시 조선은 물론 명나라에도 최대의 안보위협이었다.

신숙주는 1460년(세조 6) 마침내 강원도·평안도·함길도 도체찰사 겸 선위사가 되어 병력을 이끌고 동북방면에 자주 출몰하여 약탈하던 모련위(毛憐衛) 여진족을 소탕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그는 북방의 오진(五鎭)에 이르러 직접 강을 건너 산악지대로 들어가 여진족을 유인하는 뛰어난 전술을 구사하고 군사를 여러 부대로 나누어 토벌을 감행했다.
  
그날 저녁 여진족이 밤을 타서 뒤를 공격해 오자 그는 영중(營中)에서 당황하지 않고 누운 채 막료를 불러 시 한 수를 읊었다.

虜中霜落塞垣寒 오랑캐 땅에 서리 내려 변방이 차가울사 
鐵騎縱橫百里間 철기가 백리 사이를 마음대로 달리누나 
夜戰未休天欲曉 밤 싸움 그치지 않았는데 날 밝으려 하고
臥看星斗正闌干 누워 보니 북두성이 비끼네

                     -신숙주가 여진족의 야습을 당했을 때 태연하게 읊은 시

야밤의 기습공격이었지만 장수들이 신숙주의 대응 태세를 보면서 용기를 내어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진족을 추격하여 그 다음날 여진족의 소굴을 완파하였다. 이 때 신숙주가 이끄는 부대는 추장급 여진인을 90여명을 죽였고 일반인 430여명을 붙잡거나 살해했으며 9백여채의 집을 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전과 규모로 보면 세종 때 최윤덕의 파저강 정벌에 버금가는 큰 전과였다. 성공적인 북정 후에는 북방 방비 강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가 여진을 공격하여 대첩을 거두고 개선하자 세조는 그의 탁월한 군사 전술을 기록에 남기도록 했다.

1461년(세조 7)에 완성한 《북정록(北征錄)》이다. 또한 남해안에도 병력의 파견을 건의하여 남해안을 약탈하는 왜구를 토벌하게 하고 해안가와 변방의 성곽을 수축, 개보수하고 화포류를 설치하여 미구에 있을지도 모를 외침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에도 성곽을 쌓고, 각 군의 성곽도 개보수해 나갔다. 북로남왜의 위협에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로 대비하도록 한 것이다.

신숙주에 대한 유성룡의 평가(징비록 懲毖錄)  
조일 7년전쟁(壬辰倭亂)을 몸소 경험한 유성룡은 사직한 후 낙향하여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했다. 징비록은 책이지만 국보(제132호)로 지정되어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징비(懲毖)’는 ‘징전비후(懲前毖後)’, 즉 “지난 잘못을 거울삼아 후일을 대비한다”는 의미로 《시경(詩經)》의 소비(小毖) 편에 나온 구절(予其懲而毖後患)에서 연유한 것이다. 즉 우리가 겪은 임진난(壬辰亂)을 기록함으로써 훗날 다시 올지 모르는 우환을 경계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유성룡은 책의 본문을 시작하면서 먼저 신숙주의 일화를 기술하고 있다. 성종이 죽음을 앞둔 신숙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소?”라고 묻자 신숙주는 “원컨대 일본과의 화평을 잃지 마시옵소서”라는 말을 남겼고 이 말을 들은 성종이 일본에 화친을 위한 사신을 파견했다는 대목이다.

유성룡은 일본의 침략을 겪은 후 신숙주의 《해동제국기》를 떠올리면서 《징비록》을 남긴 것이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조선이 제일 잘못한 게 일본 정황을 잘 알지 못했다는 것임을 반성했다. 그래서 서문에 “신숙주의 유언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100년간 일본이 변하는 걸 우리가 몰랐고, 그래서 화(禍)를 당했다”고 썼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을 ‘피로인(披擄人)’이라 불렀는데, 10만 여명의 피로인 중 상당수는 노예로 유럽 등지로 팔려갔고, 30여 년간 돌아온 자는 고작 6000여 명에 불과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숙주는 이 책을 통해 첫째, 일본이 일으킬지도 모를 전란에 대한 경계심과, 둘째 대비책으로 무력 사용보다는 평소 그들을 어루만져 달래는 외교, 셋째 나라 안의 정치를 충실히 하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 하는 국론통일과 국력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징비록》에서 유성룡은 특히 세 가지를 명심하라고 했다. 첫째, 한 사람의 정세 오판으로 천하의 큰일을 그르침을 경계하는 것, 둘째 지도자가 군사를 다룰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준 것과 같다는 것, 셋째 유사시 믿을 만한 후원국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와 유성룡의 《징비록》이 말하는 요지는 ‘자강(自彊)과 유비무환’이다. ‘환란이 닥치기 전에 스스로 힘을 길러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체이다.

신숙주의 외교 유화책과 국론통일 지적에도 불구하고 120년 후에는 결국 임진전란을 맞게 되고, 유성룡은 다시는 이런 환란을 겪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징비록》을 남겼지만 훗날 조선은 일본의 강제병합을 막지 못했다.    

 

  1. 신숙주는 변절자인가, 유능한 재상인가  

많은 사람들이 ‘변절자 신숙주’와 ‘유능한 재상 신숙주’로 상반된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신숙주의 변절과 배신은 ‘자발적 선택’이 아니고 수양과 반정세력에 의한 ‘피동적 선택’이었다. 물론 자의가 아닌 타의에 강요받은 선택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변절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으나 30대의 비정치적 성향의 ‘선비형 천재’에게 그런 선택은 운명으로 여겨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숙주는 반정을 거부해 사육신이 되는 삶을 선택하지도 않았고, 동시에 반정 참여를 대가로 권력과 부귀영화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은 그가 “항상 대체(大體)를 생각하고 소절(小節)에는 구애되지 않았으며 큰일에 처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강하(江河)를 자르듯 하여 조야(朝野)가 의지하고 중히 여겼다”고 적고 있다.

실록을 쓴 사신(史臣)도 “세종이 ‘신숙주는 국사(國事)를 부탁할 만한 자이다’라고 하였고, 세조는 ‘경은 나의 위징(魏徵)이다’라고 하였다”고 기록해 전하고 있다. 계유정난 당시 신숙주는 성삼문 등으로부터 단종 복위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청 받았으나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한명회 등 반정세력에게 이 사실을 고변 하지 않았는데, 뒤에 김질(金礩)이 거사를 폭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성종대에 들어 대의명분에 입각한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한명회 등 반정의 공신들을 훈구파(勳舊派)로 배척했고, 중종(中宗·재위 1506~1544)대에는 주류세력이 되어 사육신과 생육신의 용어를 만들고 사육신의 성삼문은 충절의 표상으로, 신숙주는 ‘기회에 능한 변절자’로 매도했다.
  
신숙주는 훈구 공신의 지위에 있었으나 평생 사치스럽게 행동하지 않았고, 위세를 부리지 않고 겸손하게 처신하여 세인들의 칭송과 덕망 높은 인물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장례는 지극히 간소하게 하고 무덤에는 몇 권의 책을 넣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사후 사림세력이 정치적 주류를 이루면서 그의 검소함과 겸손함도 함께 묻혀버렸다. 그는 명분보다 현실을 택한 현실주의자였다. 한편 사육신이 된 성삼문은 현실보다는 명분을 택한 이상주의자였다. 신숙주는 현실과 결과를 중시했고, 성삼문은 이상과 과정을 중요시했다.

조선의 개국을 주도한 현실주의자 정도전(鄭道傳)과 충절의 표상인 정몽주(鄭夢周)를 신숙주와 성삼문에 대비할 수 있다. 신숙주(申叔舟)는 한글 창제를 비롯해 학문과 정치, 외교, 안보 등 다양한 국정 분야에서 경력을 쌓고, 많은 업적을 남긴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신(名臣)이다.

하지만 세조 반정(反正)에 가담하여 절개를 저버리고 영달을 선택한 변절자의 표상인 듯이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는 훗날 등장한 사림(士林) 세력의 명분론에 의해 변절자로 폄하된 이후 지조와 신의가 강조되는 조선사회에서 나물 중에서도 가장 빨리 쉬어버리는 ‘숙주나물’에 비유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쓰인 이광수(李光洙)의 소설 《단종애사(端宗哀史)》도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해방 후에는 교과서에 실렸지만, 그의 부정적 이미지는 끝내 씻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신숙주는 국내적 문물정비와 대외적 안정이 필요했던 조선 전기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자신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를 토벌하여 안보 분야에서도 많은 공적을 쌓았고 폭넓은 해외 경험과 국제적 안목을 바탕으로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안보상황을 극복하면서 대외관계 외치(外治)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1. 대일관계 개선과 베세토튜브

일의대수의 한반도와 일본열도

‘일의대수(一衣帶水)’란 말은 6세기 후반 수(隋)나라 문제(文帝) 양견(楊堅)이 진(陳) 나라를 치기 위해 양자강을 건너면서 “내가 백성의 부모로서 어찌 한 가닥 좁은 강물로 인해 이를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我爲民父母 豈可限一衣帶水 不拯之乎)”라고 한데서 비롯됐다. 이 말의 뜻은 ‘옷을 묶는 띠처럼 폭이 좁은 강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거리가 아주 가깝다’는 의미로 흔히 사용된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국빈 방문했을 때 궁중만찬에서 일본 아키히토 천황은 .

“일의대수(一衣帶水)를 끼고 있는 귀국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예부터 교류가 있었으며, 귀국의 문화는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

라고 말하며 천황은 일본이 한국인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슬픔을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도 했다.

고대의 대륙문명 전수와 7세기 후반 왜가 백제·고구려·신라의 통일전쟁에 끼어든 이른바 백촌강 전투(663), 여말선초의 극심한 왜구(倭寇) 창궐(猖獗), 7여년의 조일전쟁인 임진왜란과 구한말의 국권침탈 등 한반도는 무수히 침탈을 당하였다.

현재가 과거를 떠나 존재할 수 없고, 미래 또한 현재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한일양국의 국민·신민들은 각기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표현한다. 지리적으로는 가장 가깝지만 굴절된 역사와 오도된 민족주의의 발호로 자기 기만적 정신세계에 갇혀 가장 먼 나라, ‘가까이하고 싶지 않는 싫은 나라’로 각인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한일관계는 미중 양강 구도로 재편되는 동아시아 국제체제 속에서 양국이 기본적 가치와 규범의 공유를 기반으로 하여 전 분야에 걸쳐 모든 행위자의 전면적인 협력의 추구를 요구하고 있다.

한일관계를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 양국이 향후 공동으로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이념과 가치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신시대의 한일협력을 이루기 위해서는 양국은 미래지향적 자세로 임해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 양국의 과거사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반드시 필요하며 한일 신시대는 동아시아 국가 간의 관계를 국익경쟁이나 세력균형의 전통적인 구도로만 보지 않고 보다 네트워크적인 세계정치의 시각에서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과거를 망각하지 않되 한일 협력의 심화야말로 미중 양강(G2) 시대의 생존전략일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한일관계의 심화, 발전은 대미, 대중관계의 강화와 선순환 관계에 있고 배타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한일협력의 방향을 기존의 양자관계를 중심으로 한 사고에서 탈피하여 동아시아 지역, 글로벌 영역에 걸친 한일협력이 매우 중요하다.

한일 신시대 협력의 필요성

신숙주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일본과의 우호교린을 강조하면서 “전하, 원컨대 부디 일본과의 화친을 끊지 마소서”라는 유언과 “이적을 대하는 방법은 외정(外征)에 있지 않고 내치(內治)에 있으며, 변경의 방어에 있지 않고 조정에 있으며, 전쟁을 하는 데 있지 않고 기강을 진작하는 데 있다”는 말을 오늘에 되새겨야 할 것이다.

한일간의 협력은 정치-안보-경제 이슈 중심의 과거 패러다임을 넘어서서 21세기와 함께 빠르게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문화, 환경, 정보지식, 과학기술 분야의 한일 협력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한일협력의 주체는 국가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대학을 비롯해 지식계, 기업과 지방자치체 등 전 방위로 협력 관계를 확산시켜 나가는 것이 한일 양국,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 및 공생에 매우 중요하다.

국가간 개방과 협력이 필요함에도 한일 혹은 일한 양국간 우호증진과 공동이익 추구와 같이 틀에 박히고 진부하며 상투적인 클리셰(Cliché)만 반복하는 정치인과 사회지도층의 언사는 미래 지향적 한일관계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베세토튜브(besetotube, 北首东管, ベセトチューブ)라는 기념비적 프로젝트를 한·일 양국의 국민·신민의 뜻을 모아 공동으로 연구·개발하여 다음 세기가 도래하기 전인 2099년 이전에 개통하고 노선을 점차 연장하여 아시아는 물론 미주와 유럽을 연결하는 범구관도(汎球管道)로 확장하여 천하일가(天下一家)의 글로벌 신 교통망으로 진화시켜야 한·일 일·한간의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다.

Post Author: beseto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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