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과 베세토튜브

  1.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
  2. 한중일의수평적 연대세력균형
  3.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전문

  1.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

안중근의사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의 요청으로 산포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려고 나서자 이에 참가하였고 1906년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학교경영에 전념하기도 했다.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한 후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했으며,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여 그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권총을 쏴 3발을 명중시켰다. 여순감옥에 수감된 후 1910년 3월 26일 교수형으로 순국한 한국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며,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이다.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의거 후 1910년 중국의 뤼순 감옥에서 집필한 미완성의 글로 1910년 3월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 실현을 위한 미완성의 책이다. 여순 감옥에서 담담히 사형선고를 기다리던 안중근은 필체가 좋아 많은 이에게 글씨도 남겼지만 감옥에서 의연하게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여 일본 간수마저 고개를 떨구게 하였다.

안의사는 형이 집행되기 직전 행한 마지막 유언에서 “나의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형을 집행하는 관리들도 앞으로 한일 간에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은 바로 동양평화였다.

그가 30여 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면서 남긴 마지막 유언인 동양평화는 안중근의 삶의 의미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정수이며, 그가 존재했던 이유였다. 그는 동양평화를 왜 그토록 갈망했을까?

동양평화를 위한 ‘새로운 방책’

안중근은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는 길을 찾았고, 그를 통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 제국주의를 막을 때 동양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일본이 침략적 속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대동아공영권 논리의 함정을 그는 꿰뚫어보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3국 연합 화평회의를 개설하고 은행을 설립해 3국 공통화폐를 발행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오늘날 EU와 같은 지역경제 공동체를 제안한 것으로 놀랄 만한 제안이고 선각적인 혜안을 제시했다.

안중근이 일본에게 제시한 동양평화를 위한 ‘새로운 방책’은 크게 다섯 가지이다.

첫째, 3개국 ‘정치공동체’ 창설을 제안하여 동북아 국제분쟁의 발원지인 뤼순을 국제사회에 개방하여 평화회의체 설치를 통해 3국의 ‘정치공동체’ 창설을 제안하고 있다.

둘째, 3개국 ‘경제공동체’ 창설을 제안하여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각국이 공용하는 화폐를 발행하면 신용이 생기므로 금융은 자연히 원만해 지는 3국간 경제공동체 창설을 주장하였다.

셋째, 3개국 ‘평화유지군(軍)’ 창설을 제안하여 “세 나라의 건장한 청년들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는 2개국 이상의 어학을 배우게 하여 우방 또는 형제의 관념이 높아지도록 지도하자”며, 오늘날 NATO와 같은 3개국 ‘군사공동체’ 창설을 주장하고 있다.

넷째, 상공업 발전을 통한 3개국 ‘경제협력’ 방안을 제안하여 “청과 한국 두 나라는 일본의 지도아래 상공업의 발전을 도모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일본을 선두로 청과 한국이 따라가는 3개국 ‘경제발전모델’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하게 되면 “일본은 수출을 많이 늘게 되고 재정도 풍부해져서 안정을 누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섯째, 이러한 3국 공동체에 대한 ‘국제적 지지방안’을 제안하여 민중으로부터 신용(신뢰, 지지)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대단한 힘이 된다며 3개국 평화협의체에 대한 국제사회의 보편적 지지가 중요함을 지적하였다.

◆유럽연합 구상보다 70년 앞선 동아시아 공동체론

5개월간의 수감생활과 공판과정에서 그는 줄곧 이토의 사살이 동양평화를 지키려는 정의의 응징이었음을 강조했다. 옥중 저서로 남긴 『동양평화론』에서는 하얼빈 의거를 ‘동양평화의전(東洋平和義戰)’으로 기술했다. 사형장에서의 최후 발언도 “나의 이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결행한 것이므로 임석 제원들도 앞으로 한·일 화합에 힘써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였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아시아 지역을 대상으로 한 사상이며, 이 지역 국가들의 협력을 위한 사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의 정치 및 경제공동체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이러한 통합의 범위를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세 나라에만 국한하지 않고, 더 멀리 “인도, 태국, 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을 끌어들임으로써 동북아 차원의 통합을 넘어 동아시아 전 지역을 다자적 통합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안중근은 자신의 동양평화론을 통해서 일본, 한국, 청국이 독립된 상태에서 서로 동맹을 맺어 서양의 침략에 함께 맞서야 하며, 이를 위해 일본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했던 패권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을 써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본은 안중근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9세기 말 명치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서구의 제국주의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일본은 이를 자국의 민족주의와 교묘히 결합시킨 후 “아시아인들의 아시아” 선전과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하는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일어난 일본 제국의 동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슬로건과 개념인 “대동아공영권(大東亜共栄圏 だいとうあきょうえいけん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을 기치로 아시아의 “해방자”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독일 vs 일본의 전후 리더십

안중근 ‘동양평화론’은 한중일 동양 삼국의 ‘수평적 연대’를 통한 ‘세력균형’과 높은 수준의 ‘다자간 통합’의 방법론이 여순의 ‘동양평화회의’를 통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세력균형’과 ‘다자간 통합’의 논리가 21세기 한반도 평화를 위한 조건은 서독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가 추진했던 ‘동방정책(Ostpolitik)’이 대동구권 ‘세력균형’ 정책과 ‘헬싱키 프로세스(Helsinki Process)’라는 다자간 통합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독일통일과 유럽통합으로 발전한 역사와 맥락을 같이한다.

폴란드 바르샤바 자멘호파 거리의 유대인 위령탑은 1943년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이 나치에 맞서 28일간 봉기했다가 5만6000여명이 참살당한 일을 기리는 탑이다. 1970년 12월6일 서독이 폴란드와 관계정상화를 위한 바르샤바조약을 맺는 날 아침 7시 초겨울 비가 눈물처럼 위령탑을 적셨고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그 앞에 섰다.

잠시 고개를 숙인 브란트가 뒤로 물러섰고 의례적 참배가 끝났다고 여긴 일부 기자들도 따라 몸을 뺐다. 그때 브란트가 위령탑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미친듯이 터졌다. 브란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독이 폴란드와 관계정상화를 위한 바르샤바조약을 맺는 날 아침에 브란트는 나치 독일의 잘못을 온몸으로 사죄한 것이다.

나치 강제수용소 생존자인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폴란드 수상은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던 차 안에서 브란트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그는 말했다.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Forgivable, but Unforgettable)” 그 뒤 폴란드인은 바르샤바에 브란트 광장을 만들어, 무릎을 꿇은 브란트의 모습을 담은 기념비를 세웠고 독일의 사죄와 폴란드의 용서와 화해의 본질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또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년에 맞춰 공개한 영상메시지에서 “역사에 종지부는 없다”고 선언하고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0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1월26일 베를린 연설에서 “나치의 만행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이라고 다짐하였다.

그녀는 2015년 5월3일 최초의 나치 집단수용소인 독일 바이에른주 다하우 수용소를 찾아 추도사에서 “우리는 희생자들과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를 위해 이를 기억하겠다.”고 다짐하여 반세기 전 브란트 총리가 이미 사죄하고 ‘용서’를 받았지만, 독일은 사죄와 반성을 멈추지 않는 쉼 없는 성찰로 1, 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극복하고 유럽통합을 주도하는 리더십을 확보하게 된다.

독일통일의 출발점인 ‘동방정책’을 고안한 빌리 브란트는 독일통일을 동서독 내부의 문제만이 아닌 전 유럽의 통합의 문제로 인식하였다. 즉, 통일문제를 동서독의 공간이라는 협소한 차원에서 독자적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유럽의 분단 극복을 일차적 목표로 두고 이를 통해 독일통일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동서유럽의 긴장완화를 통한 서독의 ‘세력균형’ 정책은 동서유럽 간의 진영을 초월한 ‘다자간 통합’의 길을 제공하였고 동서유럽의 긴장완화를 위한 이와 같은 서독의 헌신은 1973년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출범의 밑거름이 되었다.

1975년 미국, 소련, 서독, 동독 등 동서 양진영 35개국이 참여해 안보협력, 경제협력, 인권협력, 인도적 지원 등 10개 원칙에 대한 ‘헬싱키 프로세스’를 통해 유럽통합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를 출범시켰다.

1989년 냉전의 종식 이후 1990년 53개국 회원국이 참여한 유럽안보협력회의 파리정상회담에서 ‘새로운 유럽을 위한 파리헌장’이 채택되었고, 1995년 유럽통합의 전신인 유럽안보협력기구(OSCE)가 발족하여 동서유럽의 긴장완화 정책을 통해 양독일의 분단을 극복하고 다자간안보협의체 설립하여 유럽통합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반면 일본의 정치 지도자는 동아시아를 전쟁의 참화로 몰고 간 도조 히데키를 비롯하여 조선 총독으로서 징병·징용·공출 등 각종 수탈통치로 우리 민족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피해를 안긴 고이소 쿠니아키 등 용서받을 수 없는 전쟁범죄자들을 합사하고 있는 반역사적 시설물로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해 일본이 근대에 벌인 주요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과 민간인 246만여명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신사를 수시로 참배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2003년 9월 미국 뉴욕에 있는 보수 성향의 싱크탱크인 허드슨연구소에서 행한 강연에서 “나를 우익 군국주의자라고 부르고 싶다면 부디 그렇게 불러 달라.”며 대외 군사력 강화를 위해서라면 군국주의 비난도 감수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아베는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이름 아래 국제사회에 기여하겠다고 하나, 1993년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담화’와 1995년 일본의 태평양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며 전후 미국 맥아더 점령군 사령관 이후 형성된 일본의 평화국가로서의 정체성마저 부정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에서 제시했던 지속가능한 평화의 방법론이 이상주의적 논의가 아닌 얼마나 현실성 있는 대안이었음을 증명해주는 의미있는 사례로 1910년 안중근이 밝힌 당시 동양평화에 대한 철학과 구상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정립되어 간 유럽통합 사상과 제2차 세계대전 후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된 유럽통합사와 독일통일 과정을 비교할 때 그가 초국가적 지역통합에 있어서 얼마나 뛰어난 선구자였는지 알 수 있다.

20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안중근 의사가 한중일 삼국의 ‘수평적 연대’를 동양평화의 조건으로 제안했던 것처럼 21세기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는 한반도 내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한,중,일,미,러 5개국의 수평적 연대가 필요하다.

그러나 유럽과 동남아 지역에서 다자간 안보협력대화가 활발히 운영되고 있는 것과 달리, 동북아에서는 아직 걸음마 단계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원인은 동북아 지역이 갖고 있는 지역적 특수성으로

첫째, 동북아에서 군사적 냉전체제가 여전히 진행 중으로 3개의 거대한 핵보유국(미국, 러시아, 중국)과 경제대국(미국, 중국, 일본)이 포진해 있고, 한반도는 여전히 최후의 냉전지대로 남아 있다.

둘째, 동북아의 안보구조는 냉전시대 만들어진 쌍무동맹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본적으로 대립적 성격을 띠고 있다. 셋째, 동북아의 중심 세력인 미국과 중국이 협력보다는 경쟁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동북아 역내 국가 간의 대립은 이 지역의 세력 분포와 변화가 내포된 매우 구조적인 문제이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동북아 지역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논의와 역내 국가 간의 역사 및 영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자적 접근이 과연 가능할까?

역설적이지만 동북아 지역에서 다자안보의 필요성과 다자적 접근의 가능성을 보여준 계기는 북한 핵문제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은 동북아 최초의 안보대화로 동북아에서도 다자안보체제가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로 남게 되었다.

안중근 ‘동양평화론’이 다자간 통합을 위해 제시했던 중요한 방안은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의 최종 종착역이 동남아를 포함한 ‘동아시아평화협력’ 구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중근은 한중일의 수평적 제휴를 동양평화의 기본 구도로 인식하였다.

이를 토대로 ‘공동군항’, ‘공동의회(평화회의)’, ‘공동은행’, ‘공동군대’, ‘공용언어’ 등 매우 수준 높은 정치 및 경제공동체를 구상하였다. 안중근이 고려했던 동양평화의 범주는 동북아의 한중일 3국을 넘어서 “인도, 태국, 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동아시아를 다자간 통합의 대상을 설정하였다.

 

  1. 한중일의 ‘수평적 연대’와 ‘세력균형

자신을 지킬 최소한의 힘조차 갖지 못한 조선에게 세계패권 질서에서 떨어져 나간 대가는 혹독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고종은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러시아에 더욱더 경도되었다.

결국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집무실을 옮긴 아관파천은 ‘대러 봉쇄’라는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인 영일동맹을 초래하여 조선의 운명을 일본의 종속변수로 전락시킨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21세기, 한반도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세기 초 치욕의 역사를 딛고 불과 반세기 만에 세계에서 가장 놀랄만한 정치·경제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한반도는 100년 전 새로운 문명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세계적 차원의 냉전은 이미 종식되었으나 한반도의 냉전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며, 세계는 초국가적 다자간 통합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나 동북아는 100년 전 민족주의 역사로 회귀한 듯 갈등을 반복하고 있다.

최근 동북아 갈등의 주요 원인은 전후 질서를 인정하지 않은 일본의 우경화 때문이다.

일본의 우경화가 우리에게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동북아 전략의 틈새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평양 지역의 ‘재균형(rebalancing)’을 선언한 미국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정책과 이를 막으려는 중국의 ‘신형대국관계’는 향후 동북아에서 미중의 패권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과거 영국의 세력균형전략을 성실히 수행했던 일본은 또 다시 미국의 세계전략인 역외균형(offshore balancing)전략에 편승하여 동북아의 질서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을 비난하면서도 집단자위권 등 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려는 미국의 딜레마가 교차하는 것 또한 바로 이 때문이다.

아직 냉전의 대립구도와 역사 및 영토갈등이 여전히 남아 있는 동북아 지역에서 미중의 패권 구도와 한중일 3국의 역사와 영토 갈등은 동북아의 다자간 통합 노력을 방해하는 매우 직접적인 문제들이다. 따라서 동북아에서 냉전의 잔재를 없애고 평화와 협력을 위한 다자간 통합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차원의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첫 번째 접근은 현재의 대립구도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새로운 행위자가 필요하며 냉전의 갈등을 구조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동북아에서 평화협력구상의 범위를 동남아까지 확대하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중국은 G2 국가로서 “태평양은 중국과 미국 두 나라를 모두 포용할 만큼 넓다”며 미국과의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 New pattern of relationship between great powers)와 중화민족의 부흥을 위한 중국의 꿈(中國夢) 및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실크로드 계획인 일대일로(一帶一路, Yídài yílù ,One Belt and One Road)를 국가발전전략을 추진중이다.

아베 총리는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 전 총리로부터 물려받은 꿈인 전쟁 가능한 보통국가로 가기 위한 평화헌법 9조의 개정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과 일본의 국가주의 행보가 더욱 강화되는 상황에서 동아시아 통합 내지 동아시아 공동체 추진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일 수 밖에 없다.

안중근 의사의 평화 민족주의를 우리 시대에 적용하고 승화시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동북아 평화와 세계 평화를 이루어 내는 베세토튜브(besetotube) 프로젝트는 중국과 일본의 국가주의/민족주의가 전쟁으로 치닫지 않도록 제어해야 한다.

중국과 일본이 동아시아 평화 공존과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평화 민족주의 철학을 중국과 일본에 주창하여야 한다. 한국이 주도적으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모두가 참여하는 프로젝트로 추진하여 후기 산업화사회(Post-Industrial Society)의 지속가능한 성장(SDGs)을 담보하고 동아시아 평화체제의 기반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3.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전문

  1. 서문

대저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분명히 정해져 있는 이치이다. 지금 세계는 동서(東西)로 나뉘어져 있고 인종도 각각 달라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실용기계연구에 농업이나 상업보다 더욱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새 발명인 전기포(電氣砲: 기관총), 비행선(飛行船), 침수정(浸水艇:잠수함)은 모두 사람을 상하게 하고 사물을 해치는 기계이다.

청년들을 훈련시켜 전쟁터로 몰아넣어 수많은 귀중한 생명들을 희생물(犧生物: 하늘과 땅이나 사당의 신에게 제사 지낼 때 쓰는 짐승, 소, 돼지, 양 따위)처럼 버려, 피가 냇물을 이루고, 고기가 질펀히 널려짐이 날마다 그치질 않는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마음이거늘 밝은 세계에 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면 뼈가 시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 근본을 따져보면 예로부터 동양민족은 다만 문학에만 힘쓰고 제 나라만 조심해 지켰을 뿐이지 도무지 한치의 유럽 땅도 침입해 뺏지 않았다는, 오대주(5大洲)위의 사람이나 짐승, 초목까지 다 알고 있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런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가까이 수백 년 이래로 도덕을 까맣게 잊고 날로 무력을 일삼으며 경쟁하는 마음을 양성해서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다. 그 중 러시아가 더욱 심하다. 그 폭행과 잔인한 해악이 서구(西歐)나 동아(東亞)에 어느 곳이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악이 차고 죄가 넘쳐 신(神)과 사람이 다같이 성낸 까닭에 하늘이 한 매듭을 짓기 위해 동해 가운데 조그만 섬나라인 일본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강대국인 러시아를 만주대륙에서 한주먹에 때려눕히게 하였다. 누가 능히 이런 일을 헤아렸겠는가. 이것은 하늘에 순응하고 땅의 배려를 얻은 것이며 사람의 정에 응하는 이치이다.

당시 만일 한·청 두나라 국민이 상하가 일치해서 전날의 원수를 갚고자 해서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를 도왔다면 큰 승리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나 어찌 그것을 예상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한·청 두 나라 국민은 이와 같이 행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일본군대를 환영하고 그들을 위해 물건을 운반하고, 도로를 닦고, 정탐하는 등의 일의 수고로움을 잊고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거기에는 두가지 큰 사유가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할 때, 일본덴노(‘천황’)가 선전포고하는 글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 독립을 공고히 한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대의(大義)가 청천백일(靑天白日)의 빛보다 더 밝았기 때문에 한·청 인사는 지혜로운 이나 어리석은 이를 막론하고 일치동심해서 복종했음이 그 하나이다.

또한 일본과 러시아의 다툼이 황백인종(黃白人種)의 경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지난날의 원수졌던 심정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고 도리어 큰 하나의 인종사랑 무리[애종당(愛種黨)]를 이루었으니 이도 또한 인정의 순리라 가히 합리적인 이유의 다른 하나이다.

통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 년 동안 행악하던 백인종의 선봉을 북소리 한번에 크게 부수었다. 가히 천고의 희한한 일이며 만방이 기념할 자취이다. 당시 한국과 청국 두 나라의 뜻있는 이들이 기약없이 함께 기뻐해 마지않은 것은 일본의 정략이나 일 헤쳐나감이 동서양 천지가 개벽한 뒤로 가장 뛰어난 대사업이며 시원스런 일로 스스로 헤아렸기 때문이었다.

슬프다! 천만 번 의외로 승리하고 개선한 후로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하며 어질고 약한 같은 인종인 한국을 억압하여 조약을 맺고, 만주의 장춘(長春)이남인 한국을 조차(租借: 땅세를 주고 땅을 빌림)를 빙자하여 점거하였다.

세계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의심이 홀연히 일어나서 일본의 위대한 명성과 정대한 공훈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만행을 일삼는 러시아보다 더 못된 나라로 보이게 되었다. 슬프다. 용과 호랑이의 위세로서 어찌 뱀이나 고양이 같은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와 같이 좋은 기회를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안타깝고 통탄할 일이로다.

동양 평화와 한국 독립에 대한 문제는 이미 세계 모든 나라의 사람들 이목에 드러나 금석(金石)처럼 믿게 되었고 한·청 두 나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음에랴! 이와 같은 사상은 비록 천신의 능력으로도 소멸시키기 어려울 것이거늘 하물며 한두 사람의 지모(智謀)로 어찌 말살할 수 있겠는가.

지금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 [서세동점(西勢東漸)]환난을 동양 사람이 일치 단결해서 극력 방어함이 최상책이라는 것은 비록 어린 아이일지라도 익히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일본은 이러한 순리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인 이웃나라를 치고 우의(友誼)를 끊어 스스로 방휼의 형세[방휼지세(蚌鷸之勢):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물고 물리며 다투는 형세. 이때 어부가 나타나면 힘 안들이고 둘 다 잡아가게 된다고 해서 어부지리(漁夫之利)라는 말이 생겼다]를 만들어 어부를 기다리는 듯 하는가. 한·청 양국인의 소망은 크게 깨져 버리고 말았다.

만약 일본이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진다면 부득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소리가 한·청 두나라 사람의 폐부(肺腑: 체내의 모든 기관, 부아, 깊은 마음 속–필자)에서 용솟음쳐서 상하 일체가 되어 스스로 백인의 앞잡이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 동양의 수억 황인종 가운데 수많은 뜻있는 인사와 정의로운 사나이가 어찌 수수방관(袖手傍觀:팔짱을 끼고 앉아 남의 일 바라보듯 함)하고 앉아서 동양 전체가 까맣게 타죽는 참상을 기다리기만 할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그래서 동양 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을 하르빈에서 개전하고, 담판(談判)하는 자리를 여순(旅順口)로 정했으며, 이어 동양평화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바이다. 여러분의 눈으로 깊이 살펴보아 주기 바란다.

  1. 전감(前鑑)

(앞사람이 한 일을 거울삼아 스스로를 경계한다. 여기서는 지난 역사를 되새겨 일본 군국주의의 무모함을 경계하는 뜻)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동서남북의 어느 주(洲)를 막론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대세(大勢)의 번복(飜覆)이고, 알 수 없는 것은 인심의 변천이다.

지난날(갑오년:1894년) 청일전쟁을 보더라도 그때 조선국의 좀도둑[서절배(鼠竊輩)] 동학당(東學黨)이 소요를 일으킴으로 인해서 청·일 양국이 함께 병력을 동원해서 건너왔고 무단히 개전(開戰)해서 서로 충돌하였다. 일본이 청국을 이기고 승승장구, 요동의 반을 점령하였다.

군사요지인 여순을 함락시키고 황해함대를 격파한 후 마관(馬關)에서 담판을 벌여 조약을 체결하여 타이완(대만)을 할양받고 2억원을 배상금으로 받기로 하였다. 이는 일본의 유신(維新)후 하나의 커다란 기념사이다.

청국은 물자가 풍부하고 땅이 넓어 일본에 비하면 수십배는 되는데 어떻게 이와 같이 패했는가.

예로부터 청국인은 스스로를 중화대국(中華大國)이라 일컫고 다른 나라를 오랑캐[이적(夷狄)]이라 일러 교만이 극심하였다. 더구나 권신척족(權臣戚族)이 국권을 멋대로 희롱하고 신하와 백성이 원수를 삼고 위아래가 불화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욕을 당한 것이다.

한편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래로 민족이 화목하지 못하고 다툼이 끊임이 없었으나, 외교상의 전쟁이 생겨난 후로는 집안싸움[동실조과지변(同室操戈之變)]이 하루아침에 화해가 되고 연합하여, 한 덩어리 애국당을 이루었으므로 이와 같이 개가를 올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친근한 남이 다투는 형제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때의 러시아의 행동을 기억해야 한다. 당일에 동양함대가 조직되고 프랑스, 독일 양국이 연합하여 요코하마(橫濱)해상에서 크게 항의를 제출하니 요동반도가 청국에 돌려지고 배상금은 감액되었다. 그 외면적인 행동을 보면 가히 천하의 공법(公法)이고 정의라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호랑이와 이리의 심술보다 더 사납다.

불과 수년 동안에 러시아는 민첩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여순을 조차(租借)한 후에 군항(軍港)을 확장하고 철도를 부설하였다. 이런 일의 근본을 생각해 보면 러시아 사람이 수십년 이래로 봉천(奉天)이남 대련, 여순, 우장(牛莊)등지에 부동항(不凍港)한 곳을 억지로라도 가지고 싶은 욕심이 불같고 밀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국이 한번 영·불 양국의 천진(天津)침략을 받은 이후로 관동(關東)의 각 진영에 신식 병마(兵馬)를 많이 설비했기 때문에 감히 손을 쓸 마음을 먹지 못하고 단지 끊임없이 침만 흘리면서 오랫동안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셈이 들어맞은 것이다.

이런 일을 당해서 일본인 중에도 식견이 있고 뜻이 있는 자는 누구라도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이유를 따져 보면 이 모두가 일본의 과실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구멍이 있으면 바람이 들어오는 법이요 자기가 치니까 남도 친다는 격이다. 만일 일본이 먼저 청국을 치지 않았다면 러시아가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행동했겠는가. 가히 제 도끼에 제발등이 찍힌 격이다.

이로부터 중국 전체의 모든 사회 언론이 들끓었으므로 무술개변[(戊戌改變):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등 변법파(變法派)에 의한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 1898년 이른바 백일유신(百日維新)은 겨우 100일만에 실패로 끝났지만 그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이 자연히 양성되고 의화단[(義和團): 중국 백련교계(白蓮敎系) 등의 비밀결사. 청일 전쟁후 제국주의 열강의 압력에 항거해서 1900년대에 산동성(山東省) 여러 주현(州縣)에서 표면화하여 북경, 천진 등지에 확대되었다. 반제반만배척운동(反帝反滿排斥運動)의 주체였다]이 들고 일어났으며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는 난리가 치열해졌다.

그래서 8개국 연합군이 발해 해상에 운집하여 천진이 함락되고 북경이 침입을 받았다. 청국황제가 서안(西安)으로 파천하는가 하면 군민(軍民) 할 것 없이 상해를 입은 자가 수백만명에 이르고 금은재화의 손해는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참화는 세계 역사상 드문 일이고 동양의 일대 수치일 뿐만 아니라 장래 황인종과 백인종 사이의 분열경쟁이 그치지 않을 징조를 나타낸 것이다. 어찌 경계하고 탄식하지 않을 것인가.

이때 러시아 군대 11만이 철도 보호를 핑계로 만주 경계지역에 주둔해 있으면서 끝내 철수하지 않으므로 러시아 주재 일본공사 구리노(栗野)가 혀가 닳고 입술이 부르트도록 폐단을 주장하였지만 러시아 정부는 들은 체도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군사를 증원하였다.

슬프다! 러·일 양국간의 대참화는 끝내 모면하지 못하였다. 그 원인을 논하자면 필경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동양의 일대전철(一大前轍)이다.

당시 러·일 양국이 각각 만주에 출병할 때 러시아는 단지 시베리아 철도로 80만 군비(軍備)를 실어 내었으나 일본은 바다를 건너고 남의 나라를 지나 4,5군단과 중장비, 군량을 육지와 바다 양편으로 요하(遼河)일대에 수송했다. 비록 예정된 계산이었다고는 하지만 어찌 위험하지 않았겠는가. 결코 만전지책(萬全之策)이 아니요 참으로 무모한 전쟁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그 육군이 잡은 길을 보면 한국의 각 항구와 성경(盛京), 전주만(全州灣) 등지로, 육지에 내릴 때는 4,5천리를 지나 왔으니, 수륙(水陸)의 괴로움을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가 있다. 이때 일본군이 다행히 연전연승은 했지만 함경도를 아직 벗어나지 못했고 여순을 격파하지 못했으며 봉천에서 채 이기지 못했을 즈음이다.

만약 한국의 관민(官民)이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을미년(1895년)에 일본인이 한국의 명성황후 민씨를 무고히 시해한 원수를 이때 갚아야 한다고 사방에 격문을 띄우고 일어나서, 함경·평안 양도사이에 있던 러시아 군대가 생각지 못했던 곳을 찌르고 나와 전후좌우로 충돌하며, 청국도 또한 상하가 협동해서 지난날 의화단 때처럼 들고일어나 갑오년(1894년 청일전쟁)의 묵은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서 북청(北淸)일대의 국민이 폭동을 일으키고 허실(虛實)을 살펴 방비없는 곳을 공격하며 개평(盖平), 요양(遼陽)방면으로 유격기습을 벌여 나가 싸우고 물러가 지켰다면, 일본군은 남북이 분열되고 배후에 적을 맞아 사면으로 포위당하는 비탄함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일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면 여순, 봉천 등지의 러시아 장병들의 예기(銳氣)가 드높아 지고 기세가 배가(倍加)되어 앞뒤로 가로막고 좌충우돌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군의 세력이 머리와 꼬리가 맞아 떨어지지 못하고 중장비와 군량미를 이어댈 방도가 아득해졌을 것이다. 그러하면 야마가타[산현유붕(山縣有朋): 러일전쟁 당시 2군사령관]와 노기[내목희전(乃木希典): 러일전쟁 당시 3군사령관]대장의 경략은 틀림없이 헛된 일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청국정부와 주권자도 야심이 폭발해서 묵은 원한을 갚게 되었을 것이고, 때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른바 만국공법(萬國公法:국제법)이라느니 엄정중립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근래 외교가의 교활하고 왜곡된 술수이니 말할 것조차 되지 못한다. 병불염사(兵不厭詐: 군사행동에서 적을 속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출기불의(出其不意: 의외의 허점을 찌르고 나간다), 병가묘산(兵家妙算:군사가의 교묘한 셈) 운운 하면서 관민(官民)이 일체가 되어 명분없는 군사를 출동시키고 일본을 배척하는 정도가 극렬 참독(慘毒)해 졌다면 동양 전체를 휩쓸 백년 풍운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이와 같은 지경이 되었다면 구미 열강이 아주 좋은 기회를 얻었다 해서 각기 앞을 다투어 군사를 출동시켰을 것이다.

그때 영국은 인도, 홍콩 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육해군을 한꺼번에 출동시켜 위해위(威海衛: 산동반도에 위치한 군항)방면에 집결시켜 놓고 필시 강경수단으로 청국정부와 교섭하고 추궁했을 것이다. 또 프랑스는 사이공, 마다가스카르 섬에 있는 육군과 군함을 일시에 지휘해서 아모이 등지로 모여들게 했을 것이고, 미국, 독일, 벨기에,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그리스 등의 동양 순양함대는 발해 해상에서 연합하여 합동조약을 예비하고 이익을 같이 나누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별 수없이 밤새워 전국의 군사비와 국가재정을 통틀어 짠 뒤에 만주와 한국으로 곧바로 수송했을 것이다. 한편, 청국은 격문을 사방으로 띄우고 만주, 산동, 하남(河南), 형낭(荊囊) 등지의 군대와 의용병을 매우 급히 소집해서 용전호투(龍戰虎鬪)하는 형세로 일대 풍운을 자아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형세가 벌어졌다면 동양의 참사는 말하지 않아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때 한·청 두 나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약장(約章)을 준수하고 털끝 만큼도 움직이지 않아 일본으로 하여금 위대한 공훈을 만주땅 위에 세우게 했다. 이로 보면 한·청 두 나라 인사의 개명(開明)정도와 동양평화를 희망하는 정신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하니 동양의 뜻있는 인사들의 깊이 생각한 헤아림은 가히 뒷날의 경계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때 러일전쟁이 끝날 무렵 강화조약성립을 전후해서 한·청 두 나라 뜻있는 인사들의 허다한 소망이 다 부서지고 말았다.

당시 러·일 두 나라의 전세를 논한다면 한번 개전한 이후로 크고 작은 교전이 수백 차례였으나 러시아군대는 연전연패(連戰連敗)로 상심낙담하여 멀리서 모습만 바라보고서도 달아났다. 한편 일본 군대는 백전 백승, 승승장구하여 동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 가까이 이르고 북으로는 하르빈에 육박하였다.

사세가 여기까지 이른 바에야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왕 벌인 일이니 비록 전 국력을 기울여서라도 한두 달 동안 사력을 다해 진취하면 동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뽑고 북으로 하르빈을 격파할 수 있었음은 명약관화한 형세였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러시아의 백년대계는 하루아침에 필시 토붕와해(土崩瓦解)의 형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은밀히 구구하게 먼저 강화를 청해, (화근을)뿌리째 뽑아버리는 방도를 추구하지 않았는지, 가히 애석한 일이다.

더구나 러·일 강화 담판을 보더라도 천하에 어떻게 워싱턴을 담판할 곳으로 정하였단 말인가. 당시 형세로 말한다면 미국이 비록 중립으로 편파적인 마음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짐승들이 다투어도 오히려 주객이 있고 텃세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인종의 다툼에 있어서랴.

일본은 전승국이고 러시아는 패전국인데 일본이 어찌 제 본 뜻대로 정하지 못했는가. 동양에는 마땅히 알맞은 곳이 없어서 그랬단 말인가.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 외상이 구차스레 수만리 워싱턴까지 가서 (포츠머스)강화조약을 체결할 때에 사할린 절반을 벌칙조항에 넣은 일은 혹 그럴 수도 있어 이상하지 않지만, 한국을 그 가운데 첨가해 넣어 우월권을 갖겠다고 한 것은 근거도 없는 일이고 합당하지도 않은 처사이다.

지난날 마관(馬關)조약(청일전쟁 후 이등박문과 이홍장이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때는 본시 한국은 청국의 속방(屬邦)이었으므로 그 조약 중에 간섭이 있게 마련이었지만 한·러 두 나라 사이는 처음부터 관계가 없는 터인데 무슨 이유로 그 조약 가운데 들어가야 했단 말인가.

일본이 한국에 대해서 이미 큰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찌 자기 수단껏 자유로이 행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유럽 백인종과의 조약 가운데 삽입하여 영원히 문제가 되게 만들었단 말인가. 도무지 어이가 없는 처사이다.

또한 미국 대통령이 이미 중재하는 주인이 되었는지라 곧 한국이 유럽과 미국사이에 끼어 있는 것처럼 되었으니 중재자도 필시 크게 놀라서 조금은 기이하게 여겼을 것이다. 같은 인종을 사랑하는 의리로서는 만에 하나라도 승복할 수 없는 이치이다.

또한 (미국 대통령이) 노련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고무라상을 농락하여 바다 위 섬의 약간의 조각 땅과 파선(破船), 철도 등 잔물(殘物)을 배상으로 나열하고서 거액의 벌금을 전부 파기시켜 버렸다. 만일 이때 일본이 패하고 러시아가 승리해서 담판하는 자리를 워싱턴에서 개최했다면 일본에 대한 배상요구가 어찌 이처럼 약소했겠는가. 그러하니 세상일의 공평되고 공평되지 않음을 이를 미루어 가히 알 수 있을 뿐이다.

지난날 러시아가 동으로 침략하고 서쪽으로 정벌을 감행해, 그 행위가 몹시 가증하므로 구미 열강이 각자 엄정중립을 지켜 서로 돕지 않았지만 이미 이처럼 황인종에게 패전을 당한 뒤이고 사태가 결판이 난 마당에서야 어찌 같은 인종으로서의 우의가 없었겠는가. 이것은 인정 세태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슬프다. 그러므로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 이웃나라를 해치는 자는 마침내 독부(獨夫: 인심을 잃어서 남의 도움을 받을 곳이 없게 된 외로운 사람)의 판단을 기필코 면하지 못할 것이다.( 옮긴이 길원 남태욱님)


이상이 동양평화론 미완성 원고 전문으로 1. 서론 2. 전감(前鑑)에 이어 그 다음 차례는 3. 현상(現狀) 4. 복선(伏線) 5. 문답(問答)으로서 그 제목만 적어놓고 끝을 못맺고 사형집행을 당하셨다.

일반적으로 학술논문의 서술 형식이 대략 서론, 본론, 문제점, 개선방안, 결론의 順으로 “전감” “현상” “복선”이 본론에 해당되며 “문답”이 문제점과 개선방안 내지 결론에 해당됨으로 안중근의사는  논문체제를 갖추어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신 것으로 보인다.

비록 미완성 논문이나 이것만 보아도 의사의 시국관과 세계관이 얼마나 정확하고 평화사상의 심오함과 광대함 그리고 그 실천방안의 구체성과 실용성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위대한 미완성 논문의 완성과 논문 내용의 실현은 후손인 우리의 몫으로 안중근 의사의 유지를 받들어 진정 홍익인간적 세계평화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의지를 다짐하고 옥중 미완성의 동양평화론을 완수해야할 시대적 사명이 21/22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와 우리 후손 모두에게 부여되고 있다.


안의사는 순국을 앞두고 동포와 어머님, 부인, 두 아들 그리고 뮈텔주교와 빌렘신부에게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의 일부를 게재한다.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우리들 2000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 자로서 유한이 없을 것이다.

<순국하기 직전에 남긴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르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어머님께 드린 유서>

어머님 전 상서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現世)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있으니 마음을 평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안 의사의 장남)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이상이 대요(大要)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 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아들 도마 올림

<아내에게 보는 유언>

분도(맏아들) 어머니에게 부치는 글

예수를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히 모이려 하오.

반드시 감정에 괴로워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어머님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의 즐거움을 바랄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많고 많은 사연은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 1910년 경술 2월 14일 장부 도마 올림


*緣木求魚-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한다 [出典] 孟子 梁惠王章句上篇

당시 나이 50이 넘은 맹자(孟子)는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인의(仁義)를 치세의 근본으로 삼는 왕도 정치론(王道政治論)을 유세(遊說) 중이었다. 동쪽의 제나라는 서쪽의 진(秦)나라, 남쪽이 초(楚)나라와 함께 대국이었고 또 선왕(宣王)도 역량 있는 명군이었다.

그래서 맹자는 그 점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왕도정치가 아니라 무력과 책략을 수단으로 하는 패도정치(覇道政治)였으므로, 선왕은 맹자에게 이렇게 청했다.

“춘추 시대의 패자(覇者)였던 제나라 환공(桓公)과 진(晉)나라 문공(文公)의 패업(覇業)에 대해 듣고 싶소.”

“전하께서는 패도에 따른 전쟁으로 백성이 목숨을 잃고, 또 이웃 나라 제후들과 원수가 되기를 원하시옵니까?”

“원하지 않소. 그러나 과인에겐 대망(大望)이 있소.”

“전하의 대망(大望)이란 무엇입니까?”

제(齊)나라 선왕(宣王)은 웃기만 할 뿐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맹자 앞에서 패도(覇道)를 논하기가 쑥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맹자는 짐짓 이런 질문을 던져 선왕의 대답을 유도하였다.

“전하,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옷, 아니면 아름다운 색(色)이 부족하시기 때문입니까?”

“과인에겐 그런 사소한 욕망은 없소.”

선왕이 맹자의 교묘한 화술에 끌려들자 맹자는 다그치듯 말했다.

“그러시다면 전하의 대망은 천하통일을 하시고 사방의 오랑캐들까지 복종케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까? 하오나 종래의 방법(무력)으로 그것(천하통일)을 이루려 하시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緣木求魚]’과 같습니다.”

‘잘못된 방법[武力]으론 목적[天下統一]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을 듣자 선왕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니, 그토록 무리한 일이오?”

“오히려 그보다 더 심합니다.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일은 물고기만 구하지 못할 뿐 후난(後難)은 없습니다. 하오나 패도(覇道)를 좇다가 실패하는 날에는 나라가 멸망하는 재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선왕은 맹자의 왕도정치론을 진지하게 경청했다고 한다.

曰 王之所大欲 可得聞與 王笑而不言 曰 爲肥甘 不足於口與 輕煖不足於體與 抑爲采色 不足 視於目與 曰 吾不爲是也 曰 然則 王之所大欲 可知已 欲抗土地 朝秦楚 `中國而撫四夷 也 以若所爲 求若所欲 猶緣木而求魚也 王曰 若是其甚與 曰 殆有甚焉 緣木求魚 雖不得魚 無後災.

그런데 호주에는 나무에 기어 올라가는 물고기인 등목어(climbing perch, 학명: Anabas testudineus)가 있고, 아마존에는 우기에 나무 위의 줄기 틈사이 물에 여름잠 자는 종류도 있다. 그런 물고기를 잡으면 문자 그대로 ‘연목구어’가 된다. 역시 세상은 넓고 절대진리는 없다.

Post Author: beseto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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